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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오전 10시 서울 방배동 광명선원 공양간.
공양주 보살보다 더 바쁜 이들이 있다. 밥상을 펼치고, 유인물을 돌리고,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고, 방석을 깔면서도 하나 둘 모이는 도반에게 인사를 하는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재숙아 어서와.” “이쪽으로 와서 앉아.” “유인물 받았니?” “어머~ 고맙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너 참 대단하구나.”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친구 사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통 도반 사이가 아니다. 10시 30분이 되자 오디오에서 혜거 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들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왁자지껄하던 공양간에 고요가 찾아든다. 지각생들은 수업에 방해가 될까 까치발을 하고 들어온다. 그 와중에도 작은 목소리로 “은자야 이것 가져가” “지금 여기 하고 있어”라며 인사를 하고 자기 앞에 놓였던 커피도 내어준다. 내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항상 ‘나’보다 ‘친구’가 우선이고 ‘내 것 챙기기’보다 ‘친구 것 챙겨주기’가 우선이다. 친구들과 함께인 순간, 부처님 법을 함께 공부하는 현재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는 이들은 바로 창덕여고 15기 불자 동창생 모임인 창불회(회장 권도정) 회원들이다. 얼굴에는 시간을 비켜갈 수 없는 주름이 조금 생겼을 뿐 풋풋했던 소녀의 웃음과 열정은 그대로였다.
2009년 마지막 정기 모임이었던 이날은 창불회 동창생들이 각자 집에서 하던 <금강경> 사경을 회향하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금강경>을 사경하고 회향할 수 있는 인연은 엄청난 인연이야. <금강경> 사경집을 보시해 기회를 준 이순이에게 박수를 보내자.”
박수를 이끈 권도정 회장은 수업 내내 앉지도 못하고 친구들에게 묻고, 듣고,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사이 옆에서는 지난 달 손녀딸을 품에 안게 돼 감사하다는 의미의 귤이 돌려지고, 어떤 이는 당연한 내 일처럼 대중에게 전할 커피를 잔마다 따르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공양을 준비하고, 회비를 걷고,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앞으로 진행해갈 공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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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그때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 ‘여자가 공부하면 못 쓴다’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당시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했던 창덕여중에서부터 이들의 인연은 시작됐다. 당시 학사에 따라 창덕여고까지 6년을 함께 다니며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졸업 후 35여 년 만에 불자회를 조직했다. 불자 동창생 7~8명에서 시작된 창불회는 협심과 이해심, 하심과 희생심 등 불자 특유의 저력을 발휘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창불회는 32명 동창들이 함께하는 열혈 불자 모임으로까지 성장해 창덕여고 총동문회에서도 으뜸가는 모임으로 소문이 났다. 회원들은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됐고 이는 자연스럽게 창불회 활동에 참가하고자하는 동창생의 증가로 나타났다.
이들은 매년 국내 주요 사찰 순례와 템플스테이, 미얀마ㆍ중국 등 해외 성지 순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정기 법회를 통해 <금강경> <반야심경> 등 불교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우정과 친목을 넘어선 신행활동을 펼쳐왔다. 또 동창들의 경조사에는 가족처럼 함께해 왔다. 특히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조문은 물론이고 49재까지 함께 기도하며 진심어린 위로와 격려로 힘이 돼주고 있다. 작년부터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100만원을 매년 전달해 훈훈한 감동도 전하고 있다.
권도정 회장은 “이웃종교에서는 주변인의 경조사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내적 깊이는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 영가를 위한 기도를 하다보면 진정 마음으로 하는 보살행이기에 불자들의 기도 깊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며 불교계의 상제례를 통한 포교활성화에 대한 가능성도 내비쳤다.
최근에는 남편을 잃고 건강상의 문제까지 있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동창에게 창불회의 지속적인 연락과 응원은 큰 힘이 됐다. 당시 도움을 받았던 친구는 “힘든 시기에 부처님의 품으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준 회장님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김유연 씨는 “창불회 모임을 왔다 가면 마음이 넓어지고 따뜻해지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어서 돌아가요. 물 한 모금도 남을 위해 먼저 베풀고자 애쓰는 친구들을 통해 대자비심을 배워요”라며 창불회의 저력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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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정자 씨는 명퇴 후 불교 공부를 하며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김정자 씨는 “매달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에요. 매 순간 나의 행동 하나가 이 우주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도록 돕죠. 창불회는 나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에요. 세상에서 이렇게 큰 행복을 전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할 뿐”이라며 밝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창불회가 성공적인 신행단체로 성장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회원들의 자발적, 적극적 참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창불회원들은 ‘우리가 생각해도 너무 잘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아껴주느라 입에 침이 마른다.
동방불교대학에서 불교학 공부도 함께 하고 있다는 심정숙 씨도 “불자라면 누구나 이런 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배푼 조그마한 배려가 더 큰 자비심과 행복을 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로부터 권유를 받고 동참하게 된 조순남 씨는 “혈연적인 유대감이 흐른다. 활발한 교류를 통한 융합, 통합, 화합을 통해 자체 신행활동을 넘어 이웃에 포교활동까지 하고 있는 창불회에 불교계에서는 상을 줘야 한다”며 밉지 않은 자화자찬을 보였다.
회원들은 모임 내내 상대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광명선원 도헌 스님과 공양주 보살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곳에서 행복한 공부를 하고 있는 거에요”, “이 친구는 숟가락도 예쁘게 놓는다”는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모두 감사와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