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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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러시아 불자 위해 설법
11월 24~26일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서..."평등의 씨앗 심어 인류 평화의 나무로 키워야"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해온 공산주의의 본 고장 러시아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인도 다람살라를 찾은 이들이 있다. 이번 법회는 지난 8월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불교지원 정책 공시 이후 열린 행사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현재 러시아인 대다수는 가톨릭의 한 분파인 그리스정교를 신앙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 역시 한 때 러시아의 국교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번 방문이 갑작스럽지만은 않다. 러시아 불교는 13대 달라이 라마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으며 티베트불교 가운데 겔룩파 성향의 신앙형태를 지닌다.

러시아 불자를 대상으로 한 달라이 라마의 이번 법회에는 러시아와 몽고를 필두로 투와, 부르아티아, 칼메끼아, 카쟈스칸, 우즈베키스탄, 야쿠스 자치공화국 불자를 비롯 내ㆍ외국인 2700여명이 동참했다. 법회는 11월 24~26일 3일간 남걀사원 대법당에서 열렸으며 총카파 대사의 <연기찬탄게송> <삼종요도(三種要道)>를 주제로 했다. 다음은 달라이 라마의 법문 요지.



어떠한 종교건 그 전파 경로를 가로 막는 울타리는 없습니다. 불교는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생겨나 티베트, 몽고를 거쳐 러시아로 전파됐습니다. 아시아에서 생겨난 불교가 아시아의 한 부분인 러시아에서 신앙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현재 우리는 첨단 기술의 발전에 의해 매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인류는 이롭게 됐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의식 구조를 들여다보면 큰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고 자살률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됐고 아시아의 불교와 같은 종교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물질은 삶에 편리성을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바깥에 의존해 생겨난 것입니다. 정신적 고통은 물질로 치유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면의 평화인데, 그것을 얻고자 하는 길은 매우 값진 행위입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어머니의 모유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의 사고는 분별이 성숙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감정과 마음 상태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머니를 통해 자식은 평안과 안정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젖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인 것입니다.

인류사회에서 사랑과 자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사회에 속해서 살 수밖에 없는 동물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값진 사람의 삶입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는 행복한 가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행복한 사회가 형성됩니다. 마음의 정화는 종교와 무관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사회가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지성을 변화시켜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성을 바로 알고 실천하고자 할 때 ‘자비심’이 요구됩니다.


티베트 망명이후 50년 간 저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들과 대화하고 나누며 얻은 결론은 ‘사람이란 내면의 평화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도이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내면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제가 불교를 말할 때 과학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생각하는 것과 외부의 물질들을 근대 과학으로 입증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과 의식’ 측면에서 내면의 평화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선한 동기로 바른 행위를 한다면 미래 또한 밝습니다. 우리의 지성은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사회주의는 독재로 인해 사회 내부의 갈등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는 항시 이성을 통해 문제를 평화롭게 풀어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자비심은 타인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비폭력적인 문제해결 방식입니다. 러시아의 독재는 이미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러시아 헌법은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민족은 차별되고 있습니다. 자비심이란 일반적 상식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는 인류의 유지를 위해 도움이 돼야만 합니다.


# 연기자성의 空 보는 순간 보리심 싹 틔우리


부처님의 법은 ‘무아(無我)’로서 자애와 자비심을 중요시합니다. 항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집제(集諦)와 고제(苦諦)로 윤회하는 중생계의 나는 무아로서 항상 하고 개별적으로 주체하는 내가 아닌 오온(五蘊: 물질적 요소, 느낌 , 표상 , 의지작용 , 의식 )에 의지한 나입니다.

<연기찬탄게송>은 총카파 대사께서 스무 살 가량에 중관사상을 배우며 법무아(法無我)를 논한 것입니다. 집착의 아집(我執)을 멸하는 방법에 대해 설한 이 게송은 무지에서 비롯된 전도된 의식을 다룹니다. 대상을 인지하는 명료한 의식의 상태는 법집(法執)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용수보살은 ‘법계찬탄품’에서 “의식이란 대상을 인지하는 명료함 그 자체”라고 설했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분노는 대치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의 ‘멸제(滅諦)’는 번뇌 즉 무명을 자비로 없앴을 때의 청정함을 말합니다. ‘멸제’를 얻고자 하는 수행으로서의 ‘도제(道諦)’가 있습니다. 나날이 수행으로 습을 들일 때 이 모든 것은 이뤄집니다. <입행론>은 “불행을 원치 않고 불행에서 헤어나고자 하지만 그 속에 빠져들게 되고 행복을 원하나 그와 거꾸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이 ‘무명’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 까요? 그 해답은 ‘연기’를 깨닫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지하는 어떤 것도 그 모두 실재가 없습니다. 대상에 실체가 없다는 것은 연기해서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론> 24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해서’ 생겨나, ‘의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 자체에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단지 이름을 붙여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연기가 전도되지 않기 위해서 공성(空性)이며 공하기 때문에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어떤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과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륵보살은 <보성론>에서 “본연이 공하기에 어떠한 것도 둘 수 없고, 어떠한 것도 전제로서 말할 수 없다. 바른 것을 바르게 볼 때 연기로서 논한다”고 설합니다.


전생과 후생을 인정하건 하지 않건 간에 이생에서 개개인이 자기 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랑과 자비심을 발현해야 합니다. 삼선취(三善趣)를 이뤄 태어나는 것은 무아 사상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선한 인(因)을 심으면 선한 과(果)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집을 없애야만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기 위해 무아를 깨친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성제를 통해 연기의 진여를 알 때 비로소 멸제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고 합니다. 객진의 허물들이 본래 청정한 것을 잠시 가리고 있었기에 본래 청정을 깨닫게 되면 이것이 불법에서 말하는 해탈입니다.

바른 견해로서 바른 사상이 필요합니다. 모든 소지(所知)의 허물을 끊기 위한 바탕은 보리심입니다. 대상의 실제 모습을 바로 알아 번뇌의 허물을 완전히 끊은 심왕(心王)입니다. 만약 바탕에 보리심이 없다면 진정한 해탈에 이를 수 없습니다. 대상을 보는 능취와 소취로서 둘이 다르지 않다는 공을 깨우친 지혜가 진제의 보리심이 되기까지는 보리심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진제 보리심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를 잘 알아야 하며 굳건한 삼귀의를 필요로 합니다. 삼보 가운데 법보는 멸제를 말합니다. 멸제는 신심만으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멸제를 알기 위해서는 공을 깨우친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총카파 대사는 스승들을 예찬하며 <삼종요도>는 시작합니다. 윤회하는 생에 집착하지 않고 오로지 해탈을 원하는 마음을 내기에 존귀합니다. 무량한 중생을 해탈에 이끄는 이들만이 이타심의 용기를 내어 상사부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함축한다면 깨달음의 길은 선현(先賢)을 향한 입문으로서 <삼종요도>에서 말하는 청정한 염리심(厭離心)과 공을 깨우친 지혜입니다.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탈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염리심입니다. 마음의 허물을 청정히 할 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오로지 바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하겠다는 굳건한 실천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혼란은 사람들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값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번뇌를 끊고자 하는 마음을 깊게 생각하거나 죽음의 무상(無常)에 깊이 빠지다 보면 몸과 마음에 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고제(苦諦)를 알고 집제(集諦)의 인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안다면 해탈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생의 집착을 없애고 죽음의 무상을 생각하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거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속임 없는 업의 과보로써 선한 행위를 실천하며 거듭 사유해야 합니다.

‘나’는 오온에 의지해서 성립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는 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나, 몸과 마음이 나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나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무아입니다. 나에게 시작과 끝이 있을까요? 불교는 나의 시작을 찾고자 할 때 ‘나의 몸과 마음에 시작이 있는가?’를 사유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와 같이 의식의 흐름에 접근했을 때 그 시작은 찾을 수 없으며 ‘빅뱅(Big Bang: 매우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작은 물질과 공간이 약 150억 년 전 거대한 폭발을 통해 우주가 되었다고 보는 이론)’의 폭발 또한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부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란 현재 우리의 거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섯 바라밀을 행하더라고 부처를 이룰 수 없고 공을 깨우친 지혜만으로도 부처를 이룰 수 없는 이유는, 반드시 정광명(淨光明: 깨달음의 빛, 미세한 의식)을 밝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 법집(法執)의 습을 끊을 때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낮밤으로 항시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바로 염리심이 생겨납니다. 청정한 발심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위없는 깨달음인 원만한 행복의 인은 없습니다. 업과의 거짓 없음을 볼 때 연기의 거짓 없음을 볼 것입니다. 항시 ‘의해서’ 존재하기에 자성으로서 공함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자성으로서 공함을 아십시오. 모든 법이 자성으로 공하다는 자성을 알 때 인과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인도 다람살라= 가연숙 기자 | omflower@gmail.com
2009-12-07 오후 1:19:00
 
한마디
KA YEON SUK NOW SAW THE REPORT THANKS FOR EVERYONE~^^ from COLLEGE OF SARAH
(2009-12-07 오후 8: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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