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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서쪽 화엄사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젖을 수 있는 건 모두 젖고 있었고, 한편에선 빛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빛나고 있었다. 가장 큰 불전 중에 하나인 각황전은 다가가는 몇 걸음 동안에도 그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지금의 각황전 터에는 장육전이 있었다. 장육전은 전란으로 사라졌고, 많은 이야기 끝에 지금의 각황전이 세워졌다.
모든 고찰들이 그렇듯이 보이는 것들은 사라진 것들 위에 서있었고, 사라진 것들은 남아있는 것들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 옛날, 장육전이 사라지고 스님은 기도 끝에 꿈을 꾼다. 다음 날 사시마지 때 대중을 모아놓고 물 묻은 손에 밀가루를 찍어보라고 한다. 마지막 스님 한 분이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고 한다.
도량은 비 끝에 묻어온 운해에 또 한 번 젖어가고, 사시마지를 든 스님은 그 옛날의 법당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