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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통 수좌’ 효봉 스님 학술적 조명
21일, 보조사상연구원 제21차 국내학술대회 개최
효봉 스님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1888~1966)은 ‘절구통 수좌’로 불릴 만큼 수행에도 철저했다. 또, 출가 전 일제 강점기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로 활동했던 엘리트였다.

한번 앉으면 엉덩이가 짓물러 방바닥에 눌러 붙을 만큼 처절하게 수행해 ‘절구통 수좌’로 불린 스님은 목우자 지눌의 가풍을 되살리려 했던 선지식이었다.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창한 구산 스님과 <무소유>의 법정 스님, 고은 시인 등의 스승이기도 한 효봉 스님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돼 눈길을 끈다.

보조사상연구원(원장 법산)은 11월 21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법련사 대웅보전에서 제21차 국내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효봉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열리는 행사에는 법산 스님이 ‘효봉 선사의 삶과 철학’을 기조강연 하는 것을 비롯해 △‘효봉 스님의 선사상’(김방룡 충남대 교수) △‘효봉선사의 문학세계’(김용덕 한양대 교수) △‘효봉의 정혜결사와 시대적 의의’(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가 발표된다.

김방룡 교수는 효봉 스님의 선사상을 간화선과 돈오점수, 정혜쌍수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효봉 스님은 한평생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들었던 간화선사로 화두를 타파하고도 열반에 이르기 까지 ‘무자 화두’를 놓치 않았다”며 “깨침 이후에도 지속적인 닦음이 필요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또, “화두를 들 때는 항상 성성착(惺惺着)하라고 강조했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해왔다”며 “효봉 스님은 간화선과 돈오점수, 간화선과 정혜쌍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김방룡 교수는 근현대 수많은 선지식 가운데 효봉 스님만큼 지눌 스님의 선풍을 계승해 한국불교를 일신한 이는 없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목우자 선풍의 회복을 통해 한국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효봉 스님의 안목과 의지는 괄목할 성장을 이룬 지금의 한국불교에 큰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김용덕 교수는 효봉 스님 입적 후 발간된 <효봉법어집>을 통해 스님의 문학세계를 진단했다. 법어에 수록된 수십 여 편의 시와 오도송ㆍ열반송 등 게송, 경어, 서간 등이 효봉 스님의 문학작품 전부다.

김 교수는 “스님이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의식을 갖고 창작하지는 않았으나 한편 한편이 수미일관하게 완결된 시문학 형식을 갖췄다. 특히 게송으로서 온전히 한시의 격을 잘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덕 교수는 효봉 스님의 선시를 수행정진의 면려, 사사무애의 표상, 실천불교로 나누어 고찰할 예정이다.

참선 수행정진을 쉬지 않았던 스님은 법문 말미에 읊어지는 게송에서 선의 요체에 대해 은유적 상징적으로 시화하거나 부단히 수행 정진할 것을 강조했다. 사사무애의 표상은 현상계 만물이 차별 그대로 상입하고 융통해 자연 그대로 상태인 것을 시화했다. 실생활에서 삶의 지표와 수행자세, 인간 관계와 마음 자세 등 일상사를 통해서는 실천불교를 드러냈다.

김 교수는 스님의 선시를 기호학적 구조론으로 접근한 시선일여(詩禪一如), 육경(六境)과 육근(六根)을 시화하되 심체와 경계가 없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상태를 시화한 정경(情景)의 시화(詩化), ‘나는 본래 부처이다’라는 사상을 통한 진여(眞如)의 미학(美學)으로도 분석했다.

김경집 교수는 1935년 시작된 한암 스님과 효봉 스님의 인연에 주목해 한암 스님의 수선사(修禪社)가 효봉 스님의 정혜결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효봉 스님이 1935년 오대산으로 한암 스님을 찾아가 승가오칙에 입각해 철저히 수행했다”며 “만공ㆍ한암 스님 등과 안거를 마친 효봉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에 10년간 머물면서 보조국사 가풍과 정혜쌍수의 선풍을 진작시키는 원을 세웠다”고 말했다.

일본 강점기,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변질돼 보수와 진보로 분열된 한국불교는 효봉 스님이 한국불교 중흥의 원력을 세우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김경집 교수는 “효봉 스님의 한국불교 중흥의 원력은 1946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게 했다”며 “이 결사는 근래 선지식이 종종 출현했어도 정혜가 갖춰지지 않아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 죽을 때)에 앞길이 망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효봉 스님은 결사를 통해 3년간 용맹정진 했다. 이때 제정된 청규는 수행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과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黙言) 등이다. 송광사 삼일암에서 시작된 효봉 스님의 정혜결사는 교단 차원으로 확대됐다.

경허의 정혜결사와 그로부터 영향 받은 한암과 만공의 결사가 있었지만 이는 조선후기 쇠락하고 일본에 의해 변질된 한국불교를 부흥하기 위한 결사였다.

김 교수는 “한암ㆍ만공의 결사와 달리 효봉 스님의 정혜결사는 광복 후 일본 강점기에서 벗어나 한국불교 중흥을 도모했던 현대판 정혜결사의 효시”라며 “효봉 스님의 남다른 수행력이 있었기에 효봉의 정혜결사는 현대 한국불교의 시금석이 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효봉의 사상은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이어져 송광사에서 보조 지눌의 사상을 진작시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02)733-5311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9-11-11 오후 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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