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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과 불교학, 한문학까지 3전공을 하고 있는 만학도, 부채여사에게 요즘 고민이 생겼다. 그녀가 수강 중인 과목 중에 인간사의 다양한 문젯거리를 불교적 사고관에 입각해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시간이 있는데, 그녀가 맡은 과제는 한 중년여인의 고민이었다. 남편이 20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는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평생 ‘결혼’이라는 단어를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는 ‘선천적 독신’인 그녀가 부처님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남녀 간의 문제를 떠안게 됐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고심한 끝에 부채여사가 찾은 이는 히말라야에서 12년의 고행을 마치고 돌아와 교내에서 남다른 강의를 펼치고 있는 부채도사님이었다.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사시사철 부채를 소장하고 다니는 부채도사님과 부채여사의 회동은 교내 근처 옹심이미역국 전문점인 ‘화담(054-621-7779)’에서 이뤄졌다.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시작된 부채여사의 하소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에 상 위로 옹기그릇에 소담스럽게 담겨진 배추김치와 총각김치, 물김치가 올라와 메인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젓가락질이 시작됐다. 3종 김치 옆에 곁들여진 매실장이찌의 정갈하고 개운한 맛도 한몫 거들어 입맛을 더욱 돋우는 가운데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근원에 대한 본질의 답을 구하는 게 중요하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당사자가 자기 상황을 애증을 넘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게 중요해요. 그러한 과정에서 대치법도 필요해요. 가령 진언을 외우거나 절을 해 감정을 가라 안치면 자기를 보는 힘이 생기고 자기를 보면 판단을 뒤집을 수 있는 눈이 생기거든요. 중도의 지혜를 일깨우도록 방편을 써 모든 게 상대적 견해로 일어난 것이라는 걸 깨우칠 때 불교적 해결이 돼요. 우리가 끝내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있어요. 그런데 이집 김치 참 맛있네‥.”
시장기를 다독이기위해 김치에 부지런히 젓가락이 가는 부채도사님의 모습에 부채여사는 “저희 엄마도 독에서 김치를 꺼내오면 이렇게 배추머리만 잘라 내오셨어요. 늘 한복을 입으셨는데, 소매를 한단정도 접고는 손으로 김치를 쪽쪽 찢어주시곤 했는데‥”라며 돌아가신 엄마의 마음과 동화돼 잠시 김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딸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그녀의 엄마와의 추억은 옹심이미역국이 나오면서 더욱 깊어졌다.
“엄마는 늘 들기름을 넣고 미역을 볶다 쌀뜨물 붓고 곧잘 끓여주곤 했어요. 이렇게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미역국에 넣고 국간장으로 간해 마지막에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리면 고소한 맛이 나면서 참 맛있었는데‥. 이 새알심을 좀 더 크게 빚어 팥고물도 묻히고 깨도 묻히고 또 대추도 자잘하게 썰어 묻히면 경단이 되는데, 그것도 잘 만들어줬어요. 그러고 보니 엄마 어깨너머로 본 기억들이 얼추 나네‥.”
커다란 사발에 푸짐하게 담겨진 옹심이미역국을 한 대접씩 앞에 두고는 누구는 그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누구는 그저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또 누구는 낯선 음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옹심이미역국은 그렇게 각자의 뱃속을 따끈하게 채우고 있었다. 옹심이미역국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고혹적인 빛깔의 결명자차와 가을볕에 단단하게 여문 땡감 후식으로 나왔다. 포크로 대치돼 곁들여진 오죽(烏竹) 가지 한 개를 골라잡아 땡감에 콕 찔러 한입 베어 무니 가을이 다디달게도 익었다. 인간사 골치 아픈 문제도, 그들을 위한 논의도, 따지고 보면 사랑의 발로인지라 새삼 아름답게 다가오고, 포크를 대용한 오죽이 땡감에 감칠맛을 더해 방편의 지혜까지 일깨우니, 아마도 이 계절이 웅숭깊게 익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