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도법 스님
주제 : 여성! 부처를 말하다
일시 : 10월 22일
주최: 인드라망생명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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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경>은 <유마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재가득도(在家得道)를 펼쳐보인 경전으로 산스크리트의 경명은 Srimaladevi-simhanada-sutra(승만부인이 사자후한 경전)이다.
<승만경>은 승만이라는 재가여성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여 부처의 설법의 지위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승불교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증명하는 경전이기에 의미가 깊다.
승만보살은 대승(大乘), 즉 일승(一乘)을 수지함으로서 일체 중생이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법은 일승이며, 불설(佛說)에는 이승(二乘)이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중생이 번뇌에 싸여 있지만 본성으로는 여래(如來)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품(佛性:如來藏)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승사상을 계승하고 또한 여래장 사상을 천명함으로써 여래장 사상을 대승의 정계(正系)로서 자리잡게 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경전인 <승만경>을 도법 스님이 설주로 나서 강의했다. 도법 스님을 통해 흘러나오는 <승만경>의 깊고 오묘한 지혜를 함께 들어보자.
# 남녀불평등 근본적으로 없던 이야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해온지가 2000년이고, 부처님 나라를 이야기 해온 지가 2600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나라가 실현된 것을 실현된 적이 있습니까? 또 2600년 동안 불국토를 이야기 해왔는데, 불국토를 실제로 본적 있습니까? 어떠세요? 불자님들. 그럼 이게 거짓말입니까? 이런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불교는 계속 혼란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만경>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불교입장에서 남녀 불평등의 문제를 이야기 해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약을 사용해 보면 만병통치약이 있습니까? 병에 따라서 맞는 약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 거죠. 불교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불교는 초기불교 하는 사람들은 “초기불교가 진짜다” 선하는 사람들은 “선만이 진짜다” 라고 말합니다.
병의 숫자만큼 약이 있듯이 삶의 문제의 숫자만큼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내가 하는 것만이 유일하다. 내 생각이 진짜다”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 말고 다른것도 존중하고 열려있는 사고방식이 불교인의 상식이 되고 교양이 돼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불교를 내세우면서 ‘내가 하는 것만이 진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아집’이죠. 남녀불평등의 문제도 그런 의식과 같은 맥락입니다.
남녀 불평등의 사고방식이 불교의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로 표현되기 이전부터 ‘본래있던 법’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내가 출현했든 출현하지 않았든지, 또 내가 깨닫거나 깨닫지 않않았거나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있는 법’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동서고금에 차이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본래있는 법을 근거로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 한 ‘교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있는 법에 의해서 태어나고 살아가기 때문에 남녀불평등이 있을 수 가 없습니다. 동서고금에 같은 법인데, 남성에게는 적용이 되고 여성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는 것 있을 수 없는거죠. 본래 있는 법의정신으로 보면 남녀불평등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성불자들 중에는 “죽어서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겠다”는 원을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자차별금지를 외치지만 또 한편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서워요. 현실적인 불평등 구조 때문에 그러한 원을 세우지만, 그것은 피해가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것보다는 극복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부당하고, 법의 정신에도 안 맞는 것을 타파해야 합니다.
# 행위와 과보만 존재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과보가 있을 뿐 행위자는 없다.” 그 말의 뜻은 “내가 행위하는 대로 내 삶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도둑질하면 도둑놈의 삶이 이루어지고 부처행위를 하면 부처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후의 조종자가 있어서 내가 ‘도둑질’하게 하고 ‘부처님 행’하게 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배후의 조종자는 없습니다. 배후의 조종자가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틀린것입니다. 단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위 하는 겁니다. 배후의 조종자를 두는 것은 기독교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고,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종교인 브라만에서는 아트만(atman :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배후의 존재로 봤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것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단지 “네가 행동한대로 내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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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은, 불평등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파악된 상황으로 보면 완전 무방비상태로 살았던 것이 출가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출가자들의 삶이 지금처럼 보장된 것이 아니라 방랑자나 마찬가지 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보호막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출가를 허락할 수 없었던 겁니다.
또 당시 출가하겠다고 나선 여성들이 대부분 석가족 이었습니다. 출가는 가정을 버리고 나와야 하는 것인데 그런데 당시 부처님의 부인, 부처님의 어머니 등 그분들의 출가를 허락하면 출가해서도 가족들과 같이 사는 판이 되기 때문에 선뜻 허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간절함이나 내용으로 봐서는 허락을 해야 하는데 신흥종교 이었던 데다 당시 사회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승만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행위와 행위의 과보만 있을 뿐 행위 하게 하는 자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승만부인이 정법으로 삶을 살아가니까 대승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정법에 대한 신심과 원력으로 살면 대승보살이죠. 정법에 대한 신념과 원력이 없으면 대승보살이라 할 수 없습니다.
# 오늘을 잘살면 내일 걱정은 없다
오늘을 제대로 살면,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또 삶을 제대로 살면, 죽은 다음의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을 충실히 하는데 내 존재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내일 걱정하고 모레를 걱정합니다. 또 현재보다는 내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몽상입니다. 제가 경험 한 것도 그렇고 부처님 말씀도 그렇고 오늘을 제대로 살면 내일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괜히 내일 일을 걱정해서 오늘을 허비합니다.
오늘을 제대로 사는 것이. 이생을 잘사는 것이 경험으로 봐도 그렇고 부처님 법으로도 맞습니다.
<승만경> 78페이지에 나와 있는 ‘무변성제장’은 ‘무한히 성스러운 진리를 다루는 장’ 입니다. 주로 여기서는 ‘기존한 불교는 불충분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새로운 불교사상이 진짜이고 깊고 풍부하다.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존한 불교(초기불교의 가르침)보다 ‘여래장 사상’을 성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성의 의미는 일체 성문과 연각은 아닙니다. 성문과 연각은 헤아릴 수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고, 성문과 연각은 일부분의 공덕만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스러운 진니라고 하는 것은 성문과 연각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겅문과 연각의 공덕도 아닙니다.”
승만경을 여래장사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에는 ‘내가 주체적으로 수행해서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후 중생을 위해 법을 전한다’는 것이 종교의 이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로 오면 사회완성의 의미가 보태집니다.
여래장 사상은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여래장은 깊고 깊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 와서는 ‘본래부처론’으로 발전합니다. 요즘에와서 대승불교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이야기가 많은데 실제 내용으로 보면 대단히 놀라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초기불교 당시는 바라문교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지금 말하면 힌두교입니다. 바라문의 아트만(atman)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그것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를 정화시켜야만 바른 행위가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무아’라는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본래취지가 왜곡됐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치료하려다 보니 다른 처방이 필요했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여래장(如來藏) 사상’과 ‘일심(一心)사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속에서 명확하게 실천할 수 있는것은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매 순간순간 확인하며 매순간 깨어있는겁니다. 아름다운꽃을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첫 번째 화살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욕심을 내서 꺾는 것은 제2의 화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분별하지 말하는 것은 제2의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겁니다. 욕심을 가지지 마라는 겁니다. 감정과 욕심을 분리 시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순간 매 사안마다 확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