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자선단체 식당을 찾은 달라이 라마는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노숙자에게 배식을 했다. 손수 수프를 퍼주던 달라이 라마에게 40대의 노숙인이 말했다.
“내가 걸친 옷은 모두 쓰레기통에 주운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의존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 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존엄하다고 느끼세요. 나도 홈리스(homeless)입니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1953년 3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베트를 떠나 50년째 망명생활중인 노장이 농담처럼 던진 말이다.
유혈사태로 치달으며 강경해져만 가는 중국 정부의 탄압 때문에 티베트인의 향수와 설움은 어느 때보다 크고 깊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나도 홈리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질적 풍요로는 행복 보장 안돼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들어 경제적 요건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행복경제학의 창시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1974년 소득이 높아져도 반드시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1946년부터 30여 개국을 대상으로 국민의 행복도를 연구한 그의 논문에 따르면, 비례관계로 알려졌던 소득과 행복도의 관계가 일정 시점이 지나면 무관해졌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그 예로 이스털린은 1950~1970년까지 일본의 소득은 7배 증가했지만 삶의 만족도는 국민소득이 수백달러에 불과했던 방글라데시와 비슷할 정도로 떨어졌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또, 2006년 영국 신(新)경제재단(NEF)의 국가별 행복지수(HPI) 조사에서 행복지수 1위(한국은 102위)는 바누아투였다. 바누아트는 남태평양의 80여 섬으로 이뤄진 국가다. 당시 바누아트의 취업률은 7%,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900달러로 세계 233개국 중 207위였다.
‘이스털린의 역설’과 세계 최고의 행복국가 바누아트의 사례는 행복은 빵과 돈(경제)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MB정부는 한국 최초로 삶의 질 제고를 위한 ‘국민행복지수’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G20(주요 20개국) 회의에서는 국민총생산(GDP)를 대신할 ‘행복지수’ 개발이 논의됐다. 물질적 풍요 외에 행복이 국가경쟁력이 됐다.
#행복의 척도는 ‘나’
내가 행복한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003년 BBC는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피트 코언의 행복공식을 소개했다.
로스웰 등은 영국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해 개인의 감정 상태를 숫자로 표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식을 만들었다.
행복=P+(5xE)+(3xH)
P(personal, 인격)는 인생관, 적응력, 유연성 등 개인적 특성을 말한다. E(existence, 존재)는 건강, 돈, 인간관계 등 생존조건, H(higher order needs, 더 높은 수준의 조건)는 자존심, 기대, 야망, 유머 등을 뜻한다.
로스웰과 코언은 행복공식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시간을 쏟아라 △친밀한 소수가 겉도는 다수보다 낫다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라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라 △운동하고 휴식하라 △성취 가능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P’, 개인적 특성이 그대로 행복의 절대값이 된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도 행복의 값을 내는 공식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공식은 ‘욕망÷소유=행복’이다.
새뮤얼의 공식에 따르면, 내가 가진 욕망이 100인데 가진 것이 20뿐이라면 내 행복의 값은 20점이다. 하지만 내 욕망이 20이고 가진 것도 20이라면 내 행복은 100점짜리다.
나이와 행복은 어떤 관계일까? 미국 미시간대 히더 레이시 박사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젊은 사람보다 높았다. 전문가들은 노년의 행복도가 장년보다 높은 것은 나이가 들수록 욕망보다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바누아투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행복한 것도 물질에 집착 않고 소박하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기 때문이었다. 행복의 기준은 ‘나’다, 내 행복의 크기는 내 마음에 달렸다. 집착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나, ‘(행복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一切唯心造]’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왜’보다는 ‘어떻게’를 고민해야
불교는 마음공부를 강조한다. 참선 염불 간경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는 불교의 수행은 수행자로 하여금 불필요한 집착을 여의고, 헛된 욕망을 버리게 해 마음의 평안과 지혜를 준다.
불교적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는 다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생활자세와 나도 부처라는 믿음이다.
<숫타니파타>에는 부처님이 제타숲에 머물고 있을 때, 신(神)이 부처님에게 위없는 행복을 묻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며 행운을 생각합니다. 위없는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부처님은 위없는 행복을 얻는 방법으로 △존경과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인내하고 온순한 것 △세상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티가 없이 안온해야 할 것 등을 설명했다.
<아함경>에는 ‘독화살의 비유’가 있다. 활에 맞은 사람이 독화살을 뽑아내기에 앞서 누가 쐈는지, 어떤 나무와 깃털로 만든 화살을 맞았는지 등을 궁금해 한다면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만다는 이야기다.
‘독화살의 비유’는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 문제를 대할 때 “왜 이렇지?”라는 부정적 사고가 아닌, “어떻게 할까?”라는 긍정적 사고를 일깨우는 일화다.
또, 부처님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티 없이 안온해야 한다”고 설함도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할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왜’ 보다는 ‘어떻게’를 고민해야 행복이 보인다.
#믿음은 가장 큰 긍정
빵이 하나 있다. 배가 고팠을 때와 배부를 때의 빵은 입안에서 전혀 다르다. 같은 빵을 두고 배가 고프고 부름에 따라 변덕부리는 마음이 번뇌망상이고, 빵을 차별 없이 빵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혜안이다.
하지만 눈앞의 현상을 두고 개인의 체험과 인식에 따라 반응은 제 각각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의식 있는 것’이라 합리화하지만 이 또한 중생심(衆生心)이다.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것이 중생의 습성인 까닭이다. 중생이 곧 부처요, 내가 부처라는 것을 긍정하고 믿으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상견(常見)의 타파를 위해 상구보리(上求菩提)를, 단견(斷見)을 깨라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말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기에(自他不二) 산은 물이고 물이 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은 산=물이고 물=산의 경지를 초월했기에, (수행하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산=산 물=물과는 다르다.
선지식들은 사량분별에 의한 시비를 여읠 것을 강조했다. 선악 미추 아타를 비롯해 상견과 단견, 긍정과 부정의 분별 모두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분별을 여의라는 가르침의 바탕은 이에 대한 믿음이요, 긍정이다. 불교신행의 기본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다. 믿음ㆍ이해ㆍ수행ㆍ증득의 과정 중 믿음부터 갖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수행은 철저한 자기 믿음과 자기 긍정에서 시작된다. 믿고 행[修行]하면 행복해진다.
#꽃을 보는 사람은 가시를 보지 않아
장미가 있다. 장미꽃을 보는 사람에게 그 가시는 보이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시를 보는 사람은 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없다. 부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은 긍정적인 면을 보기 힘들다.
육조혜능 선사가 법성사에 들렀을 때 일이다. 그 때 마침 두 스님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 스님은 “깃발이 흔들린다”고 주장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 우기고 있었다. 육조혜능은 이 두 스님에게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두 스님의 마음이 흔들릴 뿐이다”라고 말했다.
바람과 깃발이라는 인식 대상(六境)이 눈(六根)을 통해 비춰진 상태에서 흔들림이라는 생각(六識)이 “바람이 흔들린다”, “깃발이 흔들린다”는 주관적 견해를 만들었다. 결국 모두 내 마음이 정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달렸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달렸다면, 가시보다 꽃을 보자. 긍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긍정마저도 부정적으로 취급해 버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긍정은 생명의 에너지요, 창조의 원동력, 행복의 근원이다.
#세계 곳곳에 부는 긍정의 바람
긍정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05년 BBC는 슬라우라는 작은 도시에서 3개월간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이론을 적용해 다큐멘터리 행복을 제작ㆍ방영했다.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은 이 프로그램은 책으로도 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서구에서 불고 있는 행복을 위한 긍정 열풍은 학계에서 처음 시작됐다. 버트란트 러셀(1872-1970)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부단한 자아성찰 △투철한 자기신뢰 △강한 생의 긍정을 꼽았다. 1998년에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제창한 ‘긍정 심리학’은 심리학계의 발상을 전환시켰다. 지금까지의 심리학이 불안, 우울,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치중했다면, 긍정 심리학은 개인의 강점과 미덕 등 긍정적 정서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4월, 하버드대 메모리얼 강당에는 새벽부터 인파가 몰렸다. 마련된 자리는 900석이었으나 8000명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달라이 라마의 ‘마음 교육’ 강연회를 듣고자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보다 수일 앞서 캘리포니아 UC버클리의 그리스 극장에서 열린 ‘자비심을 통한 평화’ 강연회 티켓 7000장도 발매 수 분 만에 매진됐다. 폭스버러의 질레트 스타디움에서의 불교 입문 강연 티켓 1만3000장도 금새 마감됐다.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려 안심법문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로 달라이 라마가 가는 곳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달라이 라마는 부처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서구 문명의 대안을 제시했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폭력, 테러, 환경오염, 경제위기 등의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즉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어 “돈과 물질은 행복의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행복은 가족과, 친구, 마음의 평화를 통해 찾을 수 있다”며 “인생의 목적은 문명이 아닌 행복에 있다”고 강조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이 망명한지 50년이 지났지만 자신과 모든 티베트인들은 반드시 티베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베이징 지도부가 조금만 넓게 생각하면 수일 내에 해결될 문제”라며 전혀 어렵고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반면에 그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세계의 많은 이들을 만나고 세상 모든 곳이 내 집임을 알게 됐다. 어디든 당신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당신의 집”이라고도 말했다.
이제는 73세의 노령으로, 50년 망명생활에도 티베트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달라이 라마.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달라이 라마의 희망은 수행을 통한 자신감. 투철한 자기긍정의 당연한 결과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면 처처불생(處處佛生)이라 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