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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지역에서 여행할 때의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가스를 경유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 다음 날 다시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몇 명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스베가스로 되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에게 귀국을 포기하고 라스베가스로 되돌아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야성을 이룬 도박장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간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다. 마음은 사람을 이곳저곳으로 이끌고 가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도 내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마음의 에너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배고플 때 먹는 마음은 ‘살려는 마음’이며 긍정적인 마음이다.
그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그러나 음식이 맛있으면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더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것은 ‘욕심’이며, 다른 말로 하면 ‘죽으려는 마음’이다. 그 때 우리는 불행해진다.
과식을 하면 복통이 일어나고, 과식이 잦으면 비만이 되며, 결국 빨리 죽게 되기 때문이다. 라스베가스로 돌아간 여행객의 마음도 욕심이며 죽으려는 마음이다. 먼저 돈을 잃고, 가족과의 단란한 행복의 기회를 잃고, 그러다 보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살려는 마음은 긍정 에너지이며, 욕심은 부정 에너지이다. 따라서 긍정 에너지가 나를 살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난 음식이 앞에 있으면 ‘내 입에 넣어야지!’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먼저 채우려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끝없는 욕심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욕심 채우는 만큼 행복해지도록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은 “세상이 망하게 된다”이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마음의 촛불을 밝혀라
모든 사람과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밝은 면과 긍정적인 부분을 잘 보고, 어떤 사람은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잘 본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내 마음이 밝으면 밝은 면이 보이고, 내 마음이 어두우면 어두운 면이 보이게 되어 있다. 나의 촛불이 밝게 켜져 있으면 어두운 방도 밝힐 수 있고, 밝은 곳은 더 밝게 보인다. 반면 나의 촛불이 꺼져 있으면 밝은 곳에서도 어둡고 어두운 방은 당연히 더 어둡다. 그 촛불은 다름 아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에 부정 에너지인 욕심과 고정관념과 상처가 있으면 촛불을 밝힐 수 없다. 내 마음에 욕심과 고정관념과 상처가 사라지면 촛불이 저절로 밝아진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밝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말은 그런 뜻이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모든 것이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뜻이다. 인간의 본성은 밝고 순수하며 그 능력이 무한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긍정심이며 동시에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런데 평소에 긍정심과 행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어두운 마음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마음은 다름 아닌 욕심과 고정관념과 상처가 누적된 상태이다. 어두운 마음이 밝고 순수한 본성을 가려서 긍정심이 부정심으로 바뀌고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것이다. 부정 에너지를 긍정 에너지로 바꾸는 것은 다름 아닌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역경은 디딤돌이다
만일 내가 장님이거나 귀머거리라면 어떨까? 아니면 말더듬이거나 노이로제 환자라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경우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불행한 사람으로 인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대한 성공을 이뤄낸 사례는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각과 청각을 상실했다. 그녀는 그 악조건으로 인해 더욱 예민하고 섬세한 촉각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장애인 권익과 여성의 평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그녀의 용기와 신념은 영원히 살아있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심한 말더듬이에다 발음도 정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입에 모래를 물고 피나는 발음 연습을 한 끝에 훌륭한 웅변가가 됐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강사들과 웅변가들에게 용기를 주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데미안>, <싯다르타>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헤세는 과로로 인해 지병인 노이로제가 발작하여 정신과의사를 만난 덕분에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그의 대표작인 <데미안>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목민심서>를 쓴 다산 선생은 18년 간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수 백 권의 명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다. <오딧세이>를 쓴 호머와 <실락원>을 쓴 밀턴도 실명한 장님이었다.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였기 때문에 더 섬세한 감각으로 작곡할 수 있었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30대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잔잔한 강물에서 노련한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으며, 눈보라와 비바람과 해충을 이겨내면서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없는 나무가 충실한 열매를 맺는 경우는 없다. 인간의 성공적인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이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고통스럽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궁핍하게 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게 한다. 그러한 연유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참을성을 길러주어, 불가능한 일도 더욱 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역경을 이기고 자신의 삶을 성공과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해야 할 단 하나의 선택은 ‘긍정’이다. 사실 주어진 상황은 누구에게나 역경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그것을 디딤돌로 삼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그것을 걸림돌로 여기고 실패의 이유로 삼는다.
#긍정이 긍정을 부른다
우리는 마음이 에너지이고, 그것이 긍정 에너지와 부정 에너지로 나누어져 있음을 안다. 긍정 에너지와 부정 에너지는 어떻게 다른가? 나와 가까운 사람, 예를 들면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또는 직장동료가 평소에 다음 두 가지 에너지 가운데 어떤 것을 드러내는지, 그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되새겨 보자.
(1) 감사 > 원망, (2) 용서 > 분노, (3) 사랑 > 증오, (4) 축복 > 시기, (5) 칭찬 > 비난, (6) 웃는 얼굴 > 화난 얼굴, (7) 현재 > 과거 또는 미래.
부등호가 위와 같이 되어 있다면 내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부등호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라면 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다 같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할 때 남들도 똑 같은 기분을 느낀다. 긍정은 긍정을 부르고, 부정은 부정을 부른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와 온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내가 긍정의 마음을 가지면 먼저 나 자신이 기분 좋아지고, 옆에 있는 사람이 기분 좋아져서 온 세상이 기분 좋아진다. 내 마음이 곧 온 세상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세상 만물이 본래 나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바르면 온 세상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내 기(氣)가 순하면 온 세상의 기도 순하게 된다”고 했다.
요즘 하버드대의 최고 인기 강좌는 ‘긍정 심리학’, 즉 ‘행복론’이라고 한다. 최근에 긍정의 심리를 다룬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강의와 책들은 긍정의 심리가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과학적인 증거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감사’이다. 누군가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때 내 기분이 좋은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의 본성에는 ‘살려는 마음’과 같은 크기의 ‘살리려는 마음’이 있다. ‘살려는 마음’이 나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살리려는 마음’은 남의 행복을 돕는 일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발휘한 ‘살리려는 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계속 뭔가 해 주고 싶어진다. 반대로 누군가가 늘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아무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은 감사한 일을 부른다. 용서, 사랑, 축복, 칭찬, 웃는 얼굴도 마찬가지다. 내가 긍정의 마음을 가지면 온 세상이 마치 거울처럼 긍정의 마음을 나에게 보낸다. 내 마음이 온 세상이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은 긍정심이며, 과거와 미래에 사는 마음은 대체로 부정적인 마음이다. 삶은 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두고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내 마음을 지금 이곳에 두고 긍정적으로 쓰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긍정이 행복한 삶의 에너지다
내 마음의 부정 에너지를 긍정 에너지로 바꾸어 본심을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명상’이다. 명상은 긍정의 장애요소인 욕심, 고정관념, 자기잣대, 마음의 상처 등 어두운 마음을 한꺼번에 씻어주는 마음의 명약이다. ‘위빠사나’를 비롯한 불교의 다양한 명상법은 물론 유학의 명상법인 ‘경(敬)’도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곰이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일념으로 정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직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모든 명상법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일념으로 정진하는 과정이다. 우리 조상들은 4300여 년 전부터 명상을 해온 전통이 있기 때문에 한국이 명상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다. 골프, 양궁, 쇼트트랙, 반도체, 디자인 등 마음의 집중이나 감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우수한 것은 뿌리 깊은 명상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명상을 통해 긍정 에너지가 생기면 일상에서의 훈련을 통해 그것을 강화해야 한다. 행동과 말과 마음을 모두 긍정 에너지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불황도 긍정하게 되고, 악연도 긍정하게 되며,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긍정하게 된다. 불황이 오지 않고 계속 호황으로 이어지면 인간성은 더욱 황폐해지고, 만일 10년 뒤에 더 큰 거품이 꺼지게 되면 나와 나의 가족, 특히 자녀들이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불황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악연으로 인해 내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것을 알고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되니 그 악연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 내 종교를 더 바르게 볼 수 있고, 다양한 종교가 있어서 종교의 폐단이 덜해지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행복도 나의 선택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긍정의 마음을 선택하면 곧바로 행복해진다.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긍정의 시작이며 끝이다. 긍정의 마음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에너지다.
손기원
지혜경영연구소 대표 / 경희대 겸임교수(성공학)
<지금 행복해야 행복한 거야> 저자, 우리 고유의 ‘지혜인 리더십’ 프로그램 개발, 청소년 집중력 캠프, 리더십 캠프 등 운영 (www.onwisd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