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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조암 영산전에는 오백나한이 모셔져있다. 10대 제자와 16성중을 포함해 정확히 오백스물여섯 분이다. 영산전의 문을 여는 순간, 나를 따라온 시간은 도마뱀의 꼬리처럼 떨어져나갔다. 되돌아갈 기억이 없다면 이곳은 영락없는 부처님시절이었다. 시절을 가늠할 수 없는 눈빛들은 먼 훗날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고, 나한 앞에 두 손 모은 불자는 그 이야기를 아는 듯 했다.
두고 온 기억을 따라 영산전 밖으로 나왔을 땐 날이 저물고 있었다. 마당엔 길어진 그림자들이 모여들었다. 문득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가 생각났다. 어둠이 내리고 영산전의 문이 닫히고 나면 경비원 래리처럼 미륵부처님이 나투시고, 오백나한이 부처님께 절을 올리면 영산회상도의 그림이 살아날 것 만 같았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