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기운이 시나브로 완연해지는 계절에 부채도사님과 그의 애제자인 수안 처사와 대연 스님은 서울의 한 뒷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부채도사님의 티베트어 강의가 끝나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인근 대학교를 졸업하고 히말라야로 떠났던 때가 어언 십년도 넘은 일이라, 일 년 전에 다시 돌아온 그 자리가 부채도사님에게는 여전히 친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일터. 학교 입구를 찾지 못해 담벼락을 넘어 쓰레기통으로 첫 등교를 했다는 모교로 돌아와 이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만도 할 테다.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거리에 나와 자기 시작한 곳이 대학로였기 때문에 내가 돌아오고 싶은 자리는 원래 대학로였어. 그 거리에서 소크라스테스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람들과 대화술을 쓰면서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는데 막상 준비를 하고보니까 나보다 더한 꼴통들이 너무 많은 거야. 거기 끼어봐야 난 표도 안 나겠더라고. 그래서 착해진 거야. 이렇게 옷도 깨끗하게 입고 머리도 묶고‥.”
착해지기 위해 오늘 아침엔 머리까지 감고나왔다는 부채도사님은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착해지면 난 또 똘아이가 될지 싶어. 그래야 세상에 다양한 메뉴판이 채워지지‥”라며 부채를 펴들고 살랑살랑 바람질을 해댄다. 하지만 대학로에서 선회해 돌아온 ''대학''이라는 제도권의 공간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고사하고라도 그의 말총머리나 생각만큼 자유로운 그만의 언어법을 이해해주기나 할까. 히말라야를 단지 해발 수천 미터의 산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그가 경험한 히말라야의 고행이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세상을 향한 그의 부채질은 쉼이 없을 테고, 때때로 그 고단함을 위로하기위해 자신에게도 한번 씩 부채질을 해댈 여정을 바라보는 재미 또한 쏠쏠할 일이다.
여하튼 끼니를 해결하기위해 부채도사님의 추억이 골목골목마다 묻어있는 동네를 이십 여분 돌아 찾아낸 곳은 건물2층에 자리 잡은 ‘시골뷔페, 연장전(02-2277-1020)’라는 간판을 단 가게였다. 가게 이름 덕에라도 장사가 되지 않아 문 닫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일행을 따라 입구에 들어서니 약간은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몸배바지 차림을 한 아줌마가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사이마냥 반긴다. 주방 근처 테이블에는 호박나물에 도라지무침이며 간장에 짭조름하게 조려진 김조림과 마늘장아찌, 두부조림 등 오만 찬이 마련되어있고, 수년 동안 길들여졌을 빨간 밥통과 들통에서는 막 지은 듯한 하얀 쌀밥과 시락국이 따끈한 김을 품고 있다. “어여들 들어와. 방금 막 해서 따뜻혀”라며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 찬 저 찬을 권하는 아줌마의 채근은 밥맛을 더욱 돋우고, 무엇보다 주인아줌마의 발목 위로 깡충하게 올라온 몸배바지와 연분홍색 슬리퍼가 압권이다. 각자 식성에 맞는 찬을 접시에 담아 부지런히 빈속을 채우는 사이에도 주인아줌마는 반찬들을 한번 씩 살펴보고 시락국도 국자로 휘휘 저어가며 음식이 식을 새라 설레발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여기가 선술집이었는데‥ 왜 있잖아. 지붕에서 뛰어내려도 다리가 성할 정도로 나지막한 일본식 건물 같은‥”
그러고 보니 지난 수업시간, 부채도사님이 군법사로 지낸 시절에 일체유심조에 대한 생생한 강의를 하고 싶어 3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일화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아마도 그 ''뛰어내리는'' 전공은 일찍이 학창시절 때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그때 일체유심조의 의미를 진짜로 알고 싶어 6개월을 고민했는데 풀리지 않아 3층에서 뛰어내려봤어. ‘나는 내 마음과 하나다‥ 여기서 뛰어내려도 포근한 모습으로 떨어질 수 있어’ 하면서 마음과 진짜 하나가 되는지 실험해봤지. 그런데 결국 이만 두 개 부러졌어. 그래서 이런 일체유심조는 아닌가보다 했지.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일체유심조가 있어‥”
엉뚱하고도 기상천외한 그의 이야기가 결코 웃지 못 할 애절함으로 다가올 때 우리의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고,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대연스님은 “주인아줌마가 금방 막 만들었다네요”라며 어디선가 따끈한 기운이 식지도 않은 수정과를 후식으로 가져왔다. 부채도사님이 온몸으로 알아낸 일체유심조의 맛을 3층에서 뛰어내려 본적도 없는 내가 제아무리 찍어먹어 본들 그 맛을 알 도리는 없으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의 일체유심조가 몸배바지 아줌마가 손맛과 정성으로 지어낸 따끈한 밥맛을 닮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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