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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초대 교정을 역임하며, 근현대 선지식으로 불교교육과 민족 독립 등에 앞장섰던 박한영 스님(1870~1948).
스님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시절, 많지도 않았던 월급에서 필묵 구입비 외에는 모두 제자의 학비에 쓰도록 내놓았고, 스님이 순례하던 때는 한 주지스님이 진수성찬을 내자 한마디 사례조차 없이 나서는 등 승려의 본분을 지키며 민중 계몽과 불교 유신운동에 헌신하는 등 이사(理事)를 겸비한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동안 업적과 사상 등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던 박한영 스님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창 선운사(주지 법만)는 9월 20일 ‘석전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제2회 백파사상연구소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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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는 혜남 스님(통도사 율원 전계사)의 기조강연 ‘석전영호 대종사의 강맥’을 비롯해 △‘석전영호 대종사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노권용 원광대 교수), △‘석전영호 대종사의 계율사상’(운문사 승가대학 교수 효탄 스님), △‘석전영호 대종사의 항일운동’(오경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 △‘석전영호 대종사의 문학관’(김상일 동국대 교수), △석전영호 대종사의 선사상과 관련한 선종사적 배경 고찰(김호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발표됐다.
혜남 스님은 기조강연에서 “조계종의 핵심 종지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표방하는 통합 종단으로 선ㆍ교ㆍ율은 물론 정토교와 밀교까지도 통합된 종단”이라며 “조선 후기까지 종사로서 법문 못하는 분도 없었고 선사로서 강사 아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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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에서 조선시대 배출된 13종사 스님들도 선과 교를 모두 겸한 강사였을 만큼, 백파긍선(1767~1852) 이전의 선사들은 모두 강사를 겸하거나 강사의 소임을 맡지 않더라도 선교를 겸수했다.
혜남 스님은 “백파의 강맥을 이은 제78조 설유처명(1858~1903) 스님도 종통과 설통을 겸한 선지식이었으며, 이 법맥을 이은 영호 스님 역시 종설겸통의 선지식이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혜남 스님은 “선가의 전법은 일인일전(一人一傳)인 것처럼 전강(傳講)도 강사의 자리를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나 이제는 자립해 연구하고 교수할 수 있음을 스승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됐다”며 “전강의 순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법맥ㆍ강맥에서 아랫 상좌가 똑똑하다고 맏상좌에 앞세우는 경우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노권용 교수는 박한영 스님의 사상을 △겸학정신과 계율엄정 △화엄적 세계관과 실천관 △겸전적 선사상으로 정리했다.
노 교수는 “스님의 사상기반은 서산휴정의 선교일치(禪敎一致), 설파를 통해 이어진 화엄교학, 백파의 선서통달(仙書通達)과 지율엄정의 가르침이 설두(1824~1889), 설유(1858~1903)을 거쳐 스님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청정계행을 강조했던 박한영 스님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계학약전>을 저술했다. 계율의 의의와 구체적인 계상, 수학의 권유 등 3장으로 구성된 책은 사분율과 <범망경> 계율은 물론 <능엄경>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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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권용 교수는 “스님이 <계학약전>을 지어 계율엄정을 천명한 것은 불교계율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불교의 타락상을 바로 잡아 민중과 사회를 선도할 새로운 불교의 기틀을 다지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박한영 스님은 한국불교의 주체성 확립과 불교인의 자각, 불교청년의 교육 및 포교의 현대화 등을 중심으로 한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다.
노 교수는 “스님은 불교청년 교육에 최대 역점을 두고 후진양성에 헌신하고, 참다운 불교정신에 바탕해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민중을 선도할 수 있는 포교의 현대화에 헌신했다”고 설명했다.
효탄 스님은 석전 스님 이후 희미해진 선운사 등의 호남지역 계맥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 초대 교정을 지내는 등 1945년 해방을 전후해 종단 내외적으로 추앙 받던 박한영 스님은 계사(戒師)로도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며 “내장사, 백양사, 금산사 등에 율원 및 계단을 설치해 호남계 율맥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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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박사는 “박한영 스님의 선교관과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은 교육과 포교를 중심으로 한 불교개혁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호법과 항일운동으로 전개됐다”고 말했다.
오 박사는 “박한영 스님이 만해 등과 함께 벌인 임제종운동은 일본불교의 침투와 일본불교에 경도돼가는 한국불교계에 각성을 촉구했고, 불교유신회 활동으로 구체화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찰령 폐지를 위한 건백서 제출과 일본의 책동에 기만당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논설을 쓰는 등 박한영 스님은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한성임시정부 수립 당시 13도 대표이자 불교계 대표로 국민대회취지서에 서명했고, 조선민족대동단 등에서도 활동했다. 또,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발기인과 진단학회 찬조회원으로 나서는 등 불교개혁과 호법운동에 국한하지 않고 국학진흥사업을 통한 민족수호운동도 펼쳤다.
국한문 혼용시대를 살았던 박한영 스님은 다수의 문학작품을 통해 불교적 문학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님은 “지극한 도는 말이 없고 주석으로 드러내나 그 한계가 있다. 다만 언어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불교인은 ‘선게(禪偈)’라 하고 세속인들은 ‘시가(詩歌)’라 부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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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교수는 “스님은 시와 선을 하나로 보는 한시(漢詩) 중심의 시적 개성론을 갖고 있었다”며 “고 말했다.
김호귀 연구교수는 “박한영 스님은 임제종 종지에 근거한 조사선 가풍을 이었다”며 “스님은 긍정적 안목을 바탕으로 구도자 정신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선지식”이라 설명했다.
법만 스님은 “선운사는 이번 학술세미나를 기점으로 박한영 스님의 수행과 학문, 업적을 조명하기 위한 사업을 점차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