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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야외 행사 때 괘불화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회화작품이다. 규모 뿐 아니라 구도와 형태, 색채감이 보여주는 높은 완성도는 예술적ㆍ문화재적 가치를 동시에 증명하고 있다.
괘불화의 시원은 고려 초기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다수의 괘불화가 국보ㆍ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학술적 연구가 뒷따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최초로 괘불화를 주제로 학술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끈다.
한국미술사연구소(소장 문명대ㆍ동국대 명예교수)는 9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 소강당에서 ‘괘불화의 성격과 의의’를 주제로 제1회 괘불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문명대 소장의 기조발제 ‘한국 괘불화의 기원문제와 경신사장 김우문필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윤은희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김창균 동국대 교수, 김정희 원광대 교수 등이 발표했다.
◇괘불화의 시원은 고려시대
문명대 소장은 “괘불화는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괘불화는 일본 큐슈 경신사에 보관 중인 고려 수월관음도”라 주장했다.
문 소장은 <삼국유사> 원종흥법편에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경(梵鏡)을 매달았다(堅法幢 縣梵鏡)”는 기록을 설명하여, “‘법당’은 괘불화의 전신인 불화적 요소를 갖춘 깃발”이라고 강조했다.
문명대 소장은 “고려시대에는 불교재의식이나 법회가 빈번하게 행해졌다”며 “봉은사 연등회, 신효사 우란재 등 정기적으로 열렸던 재의식에 불화를 걸어 놓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어 문 소장은 “임란ㆍ호란을 겪으며 비명횡사한 고혼들을 현장에서 위무하기 위한 재의식에 괘불화가 본격적으로 성행했다”고 말했다.
◇괘불화로 법화ㆍ화엄 사상 표현돼
윤은희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은 주제발표 ‘의식집을 중심으로 본 괘불화의 조성 사상’에서 “괘불 조성에는 <법화경> 사상이 중심됐고, 영산회상괘불이 가장 유행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 연구원은 “<법화경>의 선적 요소가 강조되며 염화수지형 괘불 도상이 조성되고,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아 삼신불 괘불화가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17세기 사원들이 중정(中庭) 중심의 가람구조를 형성하며 창건ㆍ재건되면서 시작된 통불교시대에는 삼신불과 삼세불이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5불로 표현되거나, 법신불 좌우에 삼세불의 좌우불로 배치되는 형식 등 괘불의 도상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윤은희 연구원은 “괘불에서 보이는 법화와 화엄사상의 통합은 조선불교미술의 중요한 특징”이라 말했다.
◇삼세불 정착으로 다불 괘불화 사라져
유마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주제발표 ‘다불 괘불화’를 통해 조선후기 유행했던 다불(多佛) 괘불화에 대해 조명했다.
유 학예연구관은 “조선 후기 괘불화는 유독 삼신삼세불의 변형이 많았고, 거대한 화폭에 다불이 그려진 괘불화가 대두됐다”고 말했다.
삼신삼세불 괘불화는 오불회(칠장사오불회괘불화 1628년 조성, 부석사오불회괘불화 1745년 조성), 사불회(부석사 영산삼신삼세괘불화 1684년 조성), 삼불회(경기 칠장사영산삼신삼세괘불화 1710년 조성) 등으로 구분된다.
유마리 학예연구관은 “1628년 조성된 경기도 칠장사오불회괘불화로부터 미륵보살이 출현하기 시작해 1673년 조성된 장곡사미륵불괘불화 등에서는 미륵불이 본존불로 대두되기 시작했다”며 “려말선초 이래 유행한 삼세불인 석가불ㆍ미륵불ㆍ아미타불, 석가불ㆍ미륵불ㆍ다보불, 또는 수기삼존불(석가불ㆍ미륵보살ㆍ제화갈라보살 등) 미륵불ㆍ보살이 포함된 삼세불과 조선조 후기 성행한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불의 삼세불, 삼신불이 17세기 괘불화에 모두 등장해 다불 괘불화가 조성됐다”고 추정했다.
유 학예연구관은 “이후 삼세불이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불로 정착되면서 다불괘불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