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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엄종 국사 배천희 스님 선양 사업 기지개
2009년 10월~2010년 10월 포항시 시인물로 지정돼
진각국사 배천희 스님(1307~1382)은 고려 말 승려로는 최고의 지위였던 국사에 오른 고승이다.

마지막 화엄종 국사인 스님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또, 깨지고 마멸된 상태로 수원 성곽 내 비각에 남은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成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보물 제14호)’와 사당, 당간지주 등 배천희 스님과 관련한 문화재들은 방치되다 못해, 2006년에는 스님의 봉분이 도굴되는 수모마저 겪어왔다.

이런 가운데, 포항시(시장 박승호)가 진각국사 배천희 스님을 2009년 10월~2010년 10월 시인물로 지정해 선양 사업을 준비 중이다.

향토사학자로 배천희 국사를 연구해 온 포항시 정신문화연구회 황인 자문위원(포항정보여고 국사교사)은 “진각국사 배천희 스님은 고려 때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킨 포항의 인물이나 스님을 아는 이가 드물다”며 “포항시와 협의해 스님을 알리는 플랭카드, 포스터 등을 게재하는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배천희 스님은 포항시 북구 흥해읍 출신이다. 13세에 화엄종찰인 반룡사(盤龍寺)에서 일비(一非) 대사에게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다.

이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 낙산사 등 10여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 76세(법랍 63세)로 입적했다. 몽산에게서 의발을 받고 귀국해 신돈과 친했다. 공민왕 16년(1367)에 국사로 대화엄종사 선교가 되고 영주 부석사의 주지로 전우를 중수하기도 했다.

스님 입적 후 왕명에 따라 고려말 목은 이색이 짓고, 혜잠이 새긴 비(보물 제14호)에는 “임금께서 진각국사라 시호를 내린 후 탑을 대각원조라 이름하고 신(이색)에게 비명을 쓰라 하명하시니… (중략) 대사께서는 두루두루 냇물처럼 흘러 다녔고 밝고 빛나기는 저 해와 같도다. 임금께서 대사를 숭배해 국사로 삼았다”라고 쓰여 있다.

흥해읍 학천리 포항공원 묘원 인근에 세워진 배천희 국사의 유허비(높이 1m)는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虛碑)’라 음각돼 있지만 비문의 다른 글씨는 마모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유허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비롯해 인근 천곡사에 남은 사당도 최근까지 낡아 허물어질 정도였던 것을 흥해 배씨 문중에서 새로 건립 중이다.

스님의 봉분은 흥해읍 양백리 마을 뒷산(일명 백산)에 있다. 일반인들의 무덤보다 규모가 크며, 대형 당간지주(높이 1m 40cm, 4각형) 2개가 무덤 양쪽에 우뚝 서 있다. 현재는 후손(국사의 속가 형인 배전의 후손)들이 음력 10월 7일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동국대 황인규 교수는 “배천희 국사는 마지막 화엄종 국사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난 개혁시대에 주체적인 한국불교를 이끌었다”라며 “당시 외교적 공적과 봉분이 남은 등 학술적 특징을 차치하고라도 한국 불교를 이끈 선지식으로 선양되야 할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9-09-14 오후 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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