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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원통보전 앞에는 칠층석탑이 하나 서있다. 탑이라기보다는 팔 다리가 없는 토르소(torso)처럼 보였다. 역사와 세월이 만든 조각 작품이었다. 몇 해 전 큰 산불로 낙산사가 스러져가던 날, 검게 그을린 칠층석탑은 한 줌 재로 변한 원통보전 앞에서 또 한 번 사라진 역사의 미망인이 되었다.
칠층석탑이 검은 상복을 벗고 젖은 눈을 뜨던 어느 가을 날, 원통보전은 꿈처럼 다시 세워지고 낙산사는 그림처럼 다시 태어났다. 역사가 슬픈 세월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석탑은 늘 홀로 남겨졌고, 또 다시 낯선 역사 속에 홀로 서야했다. 역사를 목격한 대가로 떼어준 석탑의 살점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람도 석탑을 지날 땐 석탑만큼 부서져야 석탑을 지나갈 수 있었고, 가을햇살도 석탑만큼 부서져야 석탑을 꼭 안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사라진 석탑의 살점들이 아닐까. 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석탑의 사라진 살점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