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벌써 계절을 탄다. 하늘은 깊어가고 뭉게구름은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은빛 바다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은해사. 은빛 바다 위로 가을 하늘이 다가와 있다.
먼저 부도밭이 보인다. 낮은 담장 사이로 문 없는 문이 열려 있고, 생각 끊고 앉은 부도들이 따뜻하게 앉아있다. 부도에 남은 이름과 이름 사이로 거미줄이 한가롭게 걸려있고, 사선을 넘은 작은 나비는 숲으로 날아간다. 부도의 이름을 따라 걷는 발길 위로 도토리가 뚝뚝 떨어진다.
도량엔 하얀 영가등이 걸려있다. 심검당 툇마루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있고, 법당 앞 괴불석주에는 불자들의 서원지가 부처님을 기다리고 있다. 행자들이 바빠졌다. 저녁예불이다. 사물을 울리기 위해 행자 셋이 종루에 선다. 범종 소리가 극락의 뒤를 두드리고, 기다리던 사물 소리는 시방(十方)의 끝으로 날아간다.
심검당 문이 닫히고 툇마루엔 저녁이 찾아온다. 허공에도 길이 있는지 구름은 구름이 지나간 길로, 나비는 나비가 날아간 길로, 잠자리는 잠자리가 날아간 길로, 사물소리는 사물소리를 따라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