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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과의 약속인 천일기도 동안 다시 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약자를 위한 삶으로 회향하려 합니다.”
2006년 12월 5일 1000일기도에 들어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기도 회향을 5일 앞둔 8월 25일 기자회견을 통해 소회를 밝혔다.
명진 스님은 매일 1000배씩 1000일 기도를 빠짐없이 해왔다. 산문출입조차 하지 않은 스님의 뜻이 꺽인 적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봉은사 신도였던 권양숙 여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국민장 영결식에 의식집전 차 참석한 것이 유일하다.
스님은 “김 전 대통령처럼 노 전 대통령이 노환으로 돌아가셨다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살이 있게까지 한 원인, 이것이 남길 역사 동참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 전 국민이 지켜보는 영결식 불교의식에서 불교적인 메시지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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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은 1980∼90년대 민주화운동과 조계종 개혁에 앞장서며 ‘운동권 스님’으로 불렸다. 1987년 6월 20일 서울 조계사 앞에서 열린 6월 항쟁 집회 당시 백골단에 끌려가는 명진 스님의 사진은 스님의 방 한 켠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자정 넘게 TV토론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못 일어날까하는 걱정에 자명종을 두 개 맞추고 자는 날은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났다. 불자들과의 약속이라는 긴장감이 1000일간 큰 도움이 됐다.”
사회활동을 활발히 이어가던 스님이 보수층의 텃밭인 강남, 그 중 조계종 최대 예산을 관장하는 봉은사 주지가 됐을 때, 그 자체가 화제였다. 스님은 이러한 관심을 수행중심의 사찰 구현, 투명한 사찰 운영을 기치로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재정 예산 공개 및 신도회와 함께하는 종무결정, 빠짐없이 직접 진행한 일요법회 등은 20만 재적신도에도 냉담자가 많은 봉은사 신도들의 신뢰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천일기도 또한 그 일환이었다. 명진 스님은 여러 스님, 재가신도들과 매일 아침 바루공양하고 예불과 운력을 함께하는 수행생활을 펴왔다.
스님은 “‘쇼’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출가자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이 서로 다투는 ‘쇼’보다 신도들에게 신뢰를 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쇼’를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노력으로 초기 200여명에 불과했던 봉은사 일요법회 참가자는 현재 매주 1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명진 스님이 절 안에 있는 1000일간 세간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07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촛불집회부터 2009년에는 용산참사와 전직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사회를 울렸다.
“안에 있으면서 더 투사가 된 것 같다. 몇 번이고 나가고 싶을 때, 견딘 천일동안의 자기 성찰이 출가수행자로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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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동시에 사회참여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일까. 명진 스님은 8월 30일 회향법회 후 당일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1999년 스님이 첫 방부를 들인 인제 용화선원에 9월 3일부터 산천결제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향법회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과 강석천 조선일보 주필이 나란히 축사를 할 예정이다. 또 기도동안 모은 쌀 1000가마를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강남구 교육청에 전달, 결식아동 지원에 사용할 계획이다.
끝으로 스님은 “11ㆍ12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내고 13대에 총무원장 스님의 간선추천을 고사했다. 이후 종단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봉은사를 통해 종단 변화를 꾀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찰 재정 투명화 등을 통한 봉은사의 위상확대는 종단의 미래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라며 밝은 청사진을 제시했다.
노덕현 기자
Dhavala@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