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 종합
“수행과 삶 여실지견으로 통일해야”
도법 스님, 팔정도 수행 강조



지리산 야단법석의 마지막 법주 도법 스님(움직이는선원 열중)은 주제법문 ‘본래 부처와 팔정도’를 통해 수행과 삶, 선교의 합일, 수행과 현실참여의 조화 등을 강조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

#본래 부처로 돌아가자

오늘의 한국불교는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비중도적 실천론인 이분법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ㆍ대승불교와 교학ㆍ참선불교 등으로 구분하는 비연기적 사고가 만연해있다. 이렇듯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경중?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 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수행자들도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이론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 이분법적 분별)에 회의와 갈등을 지닌 채 방황하고 있다.
이분법적인 양극단의 분별을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시키고자 본래 부처와 팔정도론을 말하려 한다.

#진리에 합일해야 무심(無心)

무심선(無心禪)을 펼쳤던 백운 선사는 <직지심체요절>에서 “특별히 불법을 따로 배울 것 없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살아가라(莫學佛法 但自無心去)”고 했다.

무심은 진리에 일치하는 마음 씀씀이와 삶을 뜻한다. 즉 ‘활동하는 것도 참선이요, 앉아있는 것도 참선이다’, ‘눈 뜨고 감는 것 그대로 문수의 눈이요, 발 들고 내려놓는 것 그대로 보현의 행이다’ 등으로 표현되듯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선불교와 교학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자리행과 이타행, 자기 수행과 현실 참여가 분리되지 않고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활발발한 불교적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ㆍ가섭ㆍ아난ㆍ원효ㆍ진묵 등은 불교사의 대표적인 무심도인들이다. 그 분들이 목석처럼 살아갔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진리에 일치하는 대비원력의 정신으로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 만남과 대화, 배움과 가르침의 삶을 통일적으로 원융시키며 활발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무심’의 참 뜻을 왜곡시켜 내면적이고 은둔적이거나 사고의 정지 또는 정적인 상태라고 알고 있다. 수행과 삶이 이원화되는 내면적이고 은둔적이며 소극적이고 정적인 삶이 마치 불교의 참모습인 것처럼 여기는 무지와 오류가 일반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일차적으로 무심, 깨달음, 수행 등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 개념들이 중생과 언어의 속성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이다. 중생과 언어가 가진 한계, 문제를 잘 모르고 그 속성대로 다루고 있다.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개신교인들은 좋아하지만, 불교인들은 싫어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하고 좋아하는 개념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말에 놀아나고, 말에 속고, 말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과 말과 지식이 쌓이고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계속 혼란스럽게 된다.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관념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임을 알아야

‘본래 부처’라는 말을 중도적으로 생각해 보자. 불광사를 창건한 광덕 스님은 언제나 ‘구원성불(久遠成佛)’, 즉 본래부처론을 가르쳤다. 스님은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 부처의 광명이 빛나고 있다. 지금 여기 현존하는 자신 밖에 그 어디에도 따로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자신을 떠나 특별하게 따로 있지도 않는 부처를 찾노라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 부처로 살아라. 본래 부처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동체대비행인 보현행원의 삶이요 대무심행의 삶”이라고 말했다.

광덕 스님이 법회할 때, 신도들에게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을 들었는가?”라고 물으면 다들 “들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대답이 없었다. 다른 것은 다 믿는데,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론이 불조의 핵심적인 가르침인데 왜 안 받아들여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분리시키고 고정시키는 언어의 속성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자체는 관념화된다. 실상은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으로, 고정되지 않았는데 고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관념화된 언어를 중도, 즉 구체적 실상에 직결시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실상과 분리시켜 관념적으로 다루면 본질이 왜곡되고 나아가 혼란스럽게 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와 모양을 쫓는 중생의 속성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부처는 아주 특별히 거룩하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말과 모양에 속고 지배받고 있다. 마음?부처?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는 ‘본래 부처’의 실상과는 관계없이 전도몽상, 즉 부처는 특별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라는 사고, 즉 자기 선입견 또는 관념대로 생각하고 믿는다.

“부처는 아주 특별한 존재, 신비한 존재, 거룩한 존재인데, 업장 덩어리인 내가 감히 부처라니, 말도 안돼!”, “맨날 미워하고 욕심 부리는 하찮은 존재인 내가 어떻게 거룩한 부처일 수 있단 말인가”하며 전도, 즉 비중도적 사고로 스스로를 비하한다.

부처는 특별한 존재, 거룩한 존재, 신비한 존재라고 하는 사고, 즉 자신의 관념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 굳이 불교 언어를 사용한다면 전도몽상의 불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문제가 되고 있는 중생들의 관념들, 즉 허망한 분별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옛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착각하지 마. 부처? 부처가 별것 아니야. 부처도 눈이 두 개야. 너희들도 눈이 두 개잖아. 너희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어”라며 중도의 길을 제시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잘 보여준 경우가 바로 <금강경>에서 부처를 “여어자(如語者), 실어자(實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불광어자(不?語者)”라고 한 것이다.

#실상에 일치한 수행이어야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지나치게 신비한 의미를 부여해 깨달음과 수행의 본뜻이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불교에 일반화된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사고 경향을 정리해보면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현실의 삶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따로따로 분리돼 있다.

이것이 불교계 문제의 원인이다. 문제의 원인이 된 비연기중도, 즉 삶을 갈등과 분열의 함정으로 빠지게 만드는 이원론적인 수행론을 해결해야 한국불교의 문제가 해결된다.

이원론적인 수행론을 극복하고 통일된 수행론을 확립해야 한다.

#‘본래 부처’가 한국불교의 약(藥)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지금 바로 국가, 종교, 이념, 선악시비, 이해득실을 넘어서는 평등의 길, 즉 대무심, 대자비, 대자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더 소유하고(所有心) 더 추구하고(所求心) 더 얻고(所得心) 더 빨리 이루려고 하는 마음(速效心)의 병 등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도 본래부처론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해결이 가능하다.

3조승찬 선사는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시켜 차별하는 마음씀을 꺼려한다. 다만, 분리시켜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말라. 그러면 확 트인 하늘처럼 명명백백하다(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했다.

이것이 부처님이 뜻하신 중도 정신을 잘 계승한 대승불교의 특징이고 탁월성이다.

#팔정도의 실천이 중도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연기법이라면, 실천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중도이다. 중도의 내용은 팔정도(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다.

한국불교인들은 중도 또는 팔정도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개념과 실상이 일치되도록 제대로 천착하지 않는다. 중도, 정도라는 개념을 중도적으로 실상에 직결시키지 않고 생각과 말만으로 극단의 사고로 다루고 있다.

팔정도(八正道)에서의 ‘바름(正)’이란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면목, 본래 부처 정신에 근거하여 제시한 수행론인 사성제를 사실대로 알아보고(如實知見) 사실대로 실천함(如實知見行)을 뜻한다. 즉 중도적 실천이다.


#실상을 바로 봐야 정견

무상ㆍ무아인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며, 부처의 견해다. 이것이 정법불교다. 실상은 분리ㆍ독립되지 않았는데 분리ㆍ독립되었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고정ㆍ불변하지 않은데 고정ㆍ불변하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삿된 견해이고 중생의 견해이며 삿된 불교다.

#본래 부처와 팔정도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쳐서 부처의 견해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순간마다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사유(正思惟)’는 실상대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의 사유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사유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사유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어(正語)’는 실상에 근거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다. <금강경>에 “여래는 진리대로 말하는 자, 사실대로 말하는 자, 진리와 다르지 않게 말하는 자, 진실에 근거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언어를 바르게 또는 중도적으로 갈고 다듬는 것이 정어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업(正業)’은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행위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업 수행이다.

‘정명(正命)’은 실상의 정신에 일치하는 생활을 위한 직업, 또는 실상에 일치하는 직업생활을 의미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명 수행이다.

‘정정진(正精進)’은 언제 어디에서나 실상에 일치하는 바른 견해ㆍ사유ㆍ언어ㆍ행위ㆍ생활ㆍ깨어있음ㆍ흔들리지 않음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다듬는 노력이다.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보다 더 선명해지도록 줄기차게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다 또,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법에 맞도록 하는 노력을 꾸준하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다.

‘정념(正念)’은 실상에 대해 깨어있음ㆍ알아차림ㆍ정신차림 등으로 설명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깨어있음이 생활화되도록 갈고 다듬는 것이 정념 수행이다.

‘정정(正定)’을 정신집중ㆍ정신통일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 삿된 선정ㆍ바른 선정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 올바름, 즉 무소유, 무소구, 무소득, 무속효심에 입각해 실천하는 집중ㆍ통일이 바른 선정이다. 올바른 선정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의 실상에 일치하는 견해ㆍ사유ㆍ언어ㆍ행동 등이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상태를 뜻한다.

#분별 않음이 안심(安心)의 길

수행은 익숙한 중생의 삶을 생소하게 하고, 생소한 본래 부처의 삶을 생활화?체질화해서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수련해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충분하게 익숙해지면, 얼음이 저절로 녹아 흐르듯이, 흙기와가 저절로 해체되듯이 무명 업식도 저절로 녹아나고 해체된다. 이런 상태를 일러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 됐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수행을 해도 불안한 것은 왜일까? 수행과 삶 등이 분리되면 온전한 삶이 되지 않아 수행한 만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가 하나인 까닭도 여기 있다. 이분법적 구분들이 하나 되지 않고 분리되는 한, 아무리 불교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또 다른 전도몽상에 불과하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늘상 이론과 실천이 함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한다. 이론이 없이 길을 가는 것은 길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길을 가는 격이 되고,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길을 알지만 길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같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오후 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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