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 종합
“간화선 목숨도 아깝지 않은 가르침”
혜국 스님, “깨달음 지상주의와 개인주의가 문제”



세 번째 법주인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선원장, 전국선원수좌회 대표)은 8월 17일 ‘간화선 제일주의에 빠져있다는 지적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한다’는 주제의 법문을 했다.

스님은 “최근 제기되고 있는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서, 자신을 “간화선을 부정하면 부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다음은 혜국 스님의 법문.

#화두, 알음알이로 접근 말아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해 가장 큰 일을 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게 한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다. 연기가 무엇인가?

돌부터 출가, 환갑 진갑 할 것 없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혜국’이지, 내 고정된 실체는 없다. 흔히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이것’과 ‘저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이것’ ‘저것’이 아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비롯해 <법화경> <열반경> <화엄경> 등에서 설한 법문을 두고 절벽과 같은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적이 있다.

처음 선방을 찾아 전강 스님에게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받았다. 전강 스님이 ‘판치생모’를 의심하라는데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나는 깨달음이 따로 있다는 아트만 사상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때 경봉 스님 회상을 찾게 됐다. 경봉 스님은 “어찌해서 ‘판떼기 이빨’에 털난 것을 화두로 하는가?”라며 “판떼기가 아니라 ‘앞이빨’에 털난 거다”라고 했다. 전강 스님은 분명 “판떼기에 털이 났다” 했는데, 경봉 스님은 다른 말을 하길래 혼란스러웠다.

한자로 ‘판치생모’를 써서 명동 화교학교를 찾아가 물었다. 판치생모가 앞이빨에 털 난 것인지, 판데기 이빨에 털난 것인지를.

어떤 노인에게 앞니가 판떼기 같다 해서 ‘판치’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송곳니는 개이빨처럼 생겨 결치, 어금니는 식치, 앞니는 판떼기처럼 생겨서 판치,

전강 스님이 틀렸다고 생각해 전강 스님을 찾아갔다. 그런 내게 전강 스님은 “저 때려 죽일 놈”이라고 호통을 쳤다.

''아무래도 화두는 안되겠다'' 싶어 주력(呪力)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성철 스님이 “선방에서 주력하는 놈도 중이냐”며 크게 나무랬다.

판떼기든, 앞이빨이든 말뿐으로, 아무 관계 없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 정리된 것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 극미생으로 나아가 한 생각 이전의 자리. 이것과 저것을 포함한 중도가 ‘화두’라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이어야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데, 어디까지 상(相)이라고 할 것인가?

서양인은 눈으로만 보지만, 동양인 입장에서는 입으로 맛본다고 하는등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본다.

연기에 의해, 각자에 의해 존재한다면 상이란 어디까지가 상인지 한계를 알 수 없었다. 특히 불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상(相)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찰나에 수백 가지 생각이 일고 사라진다.

화두에 대해 이론적으로 믿음은 가지만, 생각만 될 뿐 따라갈 수 없었다. 한 생각 일어나는 이전 자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무척 애를 썼는데, 결국 참선하던 중 화두는 깨달아야 할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화두 자체는 앞뒤 전후좌우를 모르는, 사방이 모두 몰랐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오직 모를 뿐”이 됐을 때가 중요하다.

이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조사스님들의 활구(活句)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요, 숨통이 트이는 길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근간

간화선이 대혜 스님(1089~1163)에 이르러 새로 생겨난 수행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대혜 스님 대에 와서 간화선이 정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면은 부처님 가르침인 ‘모든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有情無情 皆有佛性)’에서 시작해 달마 대사에서 육조 혜능에 이르는 조사선,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한다.

간화선은 요즘처럼 논리적으로 또는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세상에서는 최상승법이요, 역대조사가 이미 고증한 너무나 소중한 수행법이다.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송성을 깨닫는 간화선이 아니라, 따로 간화선이 제일이라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병중의 하나다.

앞선 법석에서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이 오갔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스님들이 강원에서 처음 배우는 <치문>의 첫구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각으로 가득 차 생각의 세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나온다. 내 몸안에 생각이 가득 찼을 때 생각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무념(無念)ㆍ무상(無常)ㆍ무심(無心)이든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만이 “아차 내가 착각 했구나”하고 알 수 있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꿈인지 알 수 없다.

간화선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숱한 법난과 종단분규 속에서 선맥을 지켜온 것은 종단이 아닌 간화선사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었다. 나는 간화선이 목숨을 바칠 만큼 좋다. 이만큼 지탱해온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최근 선방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

# 망상과 싸우려는 망상 버려야

내 생각이 업이지 내 생각을 벗어난 것은 없다. 수좌들에게 수행하는데 가장 문제가 무엇인지 물으면 잠과 망상이라고 한다. 내 밖에 망상이 있다면 싸울만 하다. 다만 안에 망상이 있다면 싸울 수록 망상이 치성할 것이다. 싸움을 포기해보라.

내 생각 이전자리를 깨달은 분(부처님)이 보여준 소식이 ‘삼처전심’이다. 2000여 년 넘도록 명안 대종사들이 이어준 가르침을 안 믿는다면 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무엇을 믿겠다는 것인가?

# 간화선 제일주의가 문제

향봉 스님은 “내가 있는 자리가 중도(中道)”라고 했다. ‘내’가 있는 자리도 없어진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 ‘나’는 본래 없는 것, ‘확연무상’이다. 대혜 스님 대에 간화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간화선을 대혜 스님 대에 와서 정형화를 시켰지만 부처님의 삼처전심은 무엇을 보여준 것인가“ 화두다. 말이라고 하는 상(相)이 생기기 이전을 보여준 것, 생각이전을 그냥 보여준 것이다. 옛날 ‘화두’로는 수행이 안된다는 지적은 잘못이다.



옛날 화두, 지금 화두가 어디 있는가? 화두는 모양이 없는 세계가 아닌가?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는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하다고 했다. 조주 스님을 비롯한 후대의 선지식들은 <신심명>에서 5칙(則)의 공안을 들어보였다. 언어 표현방식이 다를 뿐 말과 생각이 끊긴 도리를 이미 3조 승찬 대사 당시에도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4조 도신 대사의 안심법문을 지나 5조 홍인 대사에 이르러서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를 구체적인 선문답 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선사들은 표현 방법만 달랐지 3조 스님때도, 그 후도 화두는 일상이었다.

5조 홍인 대사가 “내게 한 물건이 있다”고 한 것과 ‘이뭣꼬’ 화두가 무엇이 다른가?

세종대왕 이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로 글자만 생긴 것이다. 간화선이 대혜 스님 대에 새로 생겼다는 말은 잘못됐다. 부처님 불법과 조사선과 간화선은 조금도 다를 것 없다. 다만, 간화선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면 아집이다.

# 간화선 부정은 부처님 부정하는 것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원오가 대혜에게 수시한 임제 정종기의 한 구절 등을 교가(敎家)에서 주석 붙이듯 알음알이 따라 해석하면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본분종사들이 금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서옹 스님이 하루는 내게 물었다. “혜국 수좌, 조주 스님이 있던 관음원을 찾은 학자들이 잣나무는 없고 측백나무라고 했다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스님, 저는 그냥 잣나무라 할랍니다.”

측백과 잣나무는 모두 인간이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깨달음의 세계는 보는 눈이 남아있는한 결코 볼 수 없는 세계다.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를 바로 보여주는 말을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 끊어지는 도리가 보배로 있다는 것은 조계선맥의 큰 자랑거리다.

#‘나’와 ‘너’의 차별은 아집 때문

화두에게 ‘나’를 전부 바쳐봤는가? 화두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내 모습인 것은 제법무아의 ‘나’를 말한다. 하지만 나와 내 영혼,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큰 병통이다. 이것은 이 방의 허공과 저 땅의 허공이 다르다는 생각과 같다. 벽만 허물면 이 허공 저 허공이 하나가 된다. 이 허공이 없어진 것도, 저 허공도 없어진 것도 아니다.

참선 수행자가 가장 실수하는 것은 유무(有無)와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유과 무가 있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아집의 벽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나의 모든 알음알이를 화두로 바꿔나갈 때 비로소 ‘나’는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생각으로는 안된다.

# 선방 문제는 선방에서 해결할 일

뜨거운 눈물 쏟는 수좌가 적다. 수행풍토에 대해 지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화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선방의 문제이지, 간화선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쯤 되면 사람들은 정신문화가 아닌 여가문화를 쫓는다. 인류의 문제다. 조계종단이 오늘날까지 온 것은 간화선의 힘이다. 간화선 자체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불교를 지켜왔지, 종단차원에서 간화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화선 명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방의 문제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마음이 아프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 선방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때다. 전통을 무시하고 새 것을 쫓는 것은 엄청난 시행착오를 야기할 것이 자명하다.

간화선은 부처님 말씀을 올곧게 전달하는 법이다. 부처님이 고맙다. 간화선법을 알려준 은혜에 고맙다. 다만, 간화선 제일주의는 병 중의 병이다. 한국 승가를 구성하는 1만 2000여 비구ㆍ비구니 가운데 간화를 참구하는 스님만 따진다면 900여 명이다.

선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두 훤히 안다. 이를 어떻게 짊어지고 가야할 것인가. 선방에서 치열하게 수행하는 900여 수좌까지도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 개인주의가 한국불교의 병폐

문제는 선방에까지 침투한 개인주의다. 선방까지 개인주의에 빠진 이유는 서구문명이 원인이다.

6살 때 서당을 다녔다. 훈장의 권위는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될 만큼 절대적이었다. 요즘 대학생들, 교수를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젊은이들이 출가해서 선방을 찾는다.

선지식이 없다고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노스님들 공경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노스님을 잔소리꾼으로 보다 보니 탁마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른 공경을 않는 것은 선방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다.

# 청규 정신이 선방 살릴 것

해제비도 꼭 고쳐져야 할 문제지만 너무 지나치게 잘못 전해지고 있다. 몇몇 절의 해제비가 수백 만원 넘는 것은 문제지만 한 달에 15만원 해제비를 받는 절도 많다.

수도암에 머물 때 어느 보살이 2만원 하는 운동화를 사왔다. 한 번 운동화를 신기 시작하니 수십년 신었던 검은 고무신을 신지 않게 됐다. 한 번 편해진 사람, 한 번 펑펑 쓰기 시작한 사람이 되돌아가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상좌들과 노력하고 있다.

간화선 자체가 아닌 현금에 의해 일어나는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은 겸허히 경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불교 역사에서 인재불사는 등한시돼 왔다. 선방에서도 인재불사를 고민해 교육원과 함께 <간화선>을 발간하고 3년째 <선원청규>를 편찬 중으로, 완성단계에 있다.

백장청규 정신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조계종이 종헌종법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니, 백장청규가 생활화되기 어려웠던 점은 사실이다. 청규 정신이 되살아나 어른스님들이 어렵게 지키고 가꾸어 온 간화선 수행 가풍이 잘 지켜지길 바란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오후 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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