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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법주로 나선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은 8월 16일 열린 법석에서 당신의 종교적 체험을 중심으로 법문했다.
스님은 “인간의 감각기관 중 ‘입’ 아닌 것이 없어 구업(口業)이 가장 중요하다”며 “세상의 중심이 ‘나’인 것을 바로 알면 경전에도 스님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정법을 만난다”고 설했다.
또, 스님은 “20년의 침묵을 깨고 나선 첫 법회가 오늘 이 자리”라며 “그동안 종교적 체험을 했으니 이제 어느 곳이든 찾아가 법문을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이다.
# 무(無)자 화두 통해 종교적 체험해
나이 마흔이 됐을 때,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영혼은 있을까?’‘간절히 기도하면 영가천도가 될까?’등 그런 궁금증이 인도로 가게 했고 그곳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 그 순간이 어떠했는지 그것은 드러낼 일도, 가르칠 일도 아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동진출가해서 학문적인 교양을 쌓지 못했다. 그래서 인도에 갔을 때 참 간절했다. 간절한 만큼 공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든 화두가 ‘무(無)자’였다. 달력을 보면, 망망대해를 보면 눈물이 나고 한국이 그리웠다.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우연히 달력을 넘기는데 환하게 불이 켜졌다. 조명이 켜진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이었다. 그 빛은 나를 준비 되어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체험 이후로 20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 가서 내가 아는 불교가 맞는지 공부했다. 부처님 경전을 통해 소승이든 대승이든 내가 본 세계가 정확한지 공부했다. 5년 전 한국에 돌아와 익산 사자암에만 기거했다.
#‘입(口)’ 아닌 것 없어
<천수경> 처음에 나오는 것이 구업이다. 신ㆍ구ㆍ의(身口意) 삼업 가운데 악구(惡口 악담), 양설(兩舌 이간질 시키는 말), 기어(綺語 꾸미는 말), 망어(妄語 거짓말) 등 구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많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손과 눈만 천 개가 아니다. 귀나 코도 천 개이다. 우리 몸에는 아홉 개의 입이 있다. 코는 국 냄새 맡는 입이고, 눈은 보는 입이고, 귀는 듣는 입이다. 따라서 정구업(淨口業)의 바른 해석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한생각에도 집착 말아야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라고 해석한다. 이것을 “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로 바꿔보자. 생로병사는 모두 집착에서 온다.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하루에 천만 가지 생각을 한다. 너무 피곤하다.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갖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 중도는 바로 ‘내’가 중심
팔만 장경의 핵심은 중도(中道)와 연기법칙이다. 그러나 중도(中道)에 대해 많은 스님들이 헤매고 있다. 경전에서 소나의 거문고 타는 말씀을 인용해 유교의 중용과 같은 의미로 중도를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문고 줄이 팽팽하면 소리가 맑지 않다. 느슨하면 둔탁하다. 좋은 소리를 내려면 줄이 고르게 되어야 한다.
<중용(中庸)>은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생활의 기본 덕목으로 삼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온당하게,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알맞게 덕과 도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은 중용과 근본을 달리한다. 중용이 양변불락(兩邊不落)사상이라면 중도는 양변무애(兩邊無碍)이자 무변중심(無邊中心)사상이다. 불교의 중도에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없는 것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쪽인가? 내가 서 있는 곳부터 해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한다. 그럼 서쪽은? 내가 서 있는 기준으로부터 해지는 곳이다. 어렵지 않다.
모서리에 앉아도 내가 앉으면 그곳이 중앙이다. 무하마드가 태어난 곳의 명칭이 메카로 바뀌었다. 어느 곳에 서 있어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목탁소리에 의해 운명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이다. 참회하면 업장이 녹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임제 선사는 불교의 중도를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으로 설명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시작해 ‘즉심시불(卽心是佛) 심외무불(心外無佛)’ 등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의 최후 유훈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번뇌가 보리요, 중생이 곧 부처’라고 <법화경> 등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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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자신감, 오늘이 중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용기를 불어 넣어줘야 한다. 나 대신 그것을 해 줄 사람은 없다. 부처는 어렵게 전달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 적이 없다. 진리는 내 주변에 널려있다. 진리와 한몸이 될 수 없는 것은 집착의 소유욕을 버리지 못해서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다. 같은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나’다.
오늘이, 금생이 제일 중요하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우울하다거나, 돈 없다고 불평하면 안된다. 살아있다는 자체로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정은 안 살피고 밖에만 잘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맞아야 한다. 내 몸, 내 가족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부처님은 “네 마음을 게을리 하지 말라. 네 마음의 스승이 최고의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써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구하지 말라, 구할 수록 마음이 어지럽다. 두드리지 말라. 언제나 문을 열려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훌륭한가?
#경전에도 부처에게도 속아서는 안돼
불교텔레비전을 보니 누워있는 부처님상을 조성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광고가 있었다. 진리가 옆에 있고, 쉽게 만날 수 있음에도 신도들은 복을 뺏길까봐 그 상을 향해 달려간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승려에게 의지할 일도 경전에 의지할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커피맛, 김치맛을 언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먹고도 설명 못하는 것은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모두 녹아들어있다. 경전에 속아서도 안되지만 스님에게 의지해서도 안된다. 내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
# 12연기 순서에 집착 말아야
12연기는 연기법칙의 큰 틀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꿰뚫어 깨달음을 얻었고, 나가르주나(용수보살)는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12연기를 역순(逆順)으로 풀었다.
성철 스님은 “12연기는 순관이든 역관이든 설명이 안된다. 깨달아야 알지 그 이전까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12연기를 설명할 수 있다. 순서로 배열돼 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어도, 예를 들어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섞여도 노래가 완성되는 것처럼 순서로 설명해서도 안되고, 역으로도 안된다. 단지 그렇게 나열해 놓은 것 뿐이다.
인과를 설명하는 것 가운데 육도 윤회는 불교와 관련 없다. 부처님이 탄생하기 500년 전부터 윤회설이 있었다. 육도 윤회를 불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교가 ‘내생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사는 동안, 마음이 열렸을 때나 닫혔을 때나 한 개체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뿐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하나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깎은 사과를 책상위에 두면 산화작용에 의해 순간순간마다 그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연기의 법칙에서는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 전생ㆍ내생 모두 없어 오직 오늘이 있을 뿐
연기의 원리에서는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범천(브라흐만)을 인정할 수 없듯, 나를 주재한다는 ‘거짓 나’(아트만)도 인정될 수 없다. 영원불변한 내가 없는데 무엇이 주체가 돼 육도윤회를 한단 말인가? 불교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겼다 하면서 다른 종교를 나무란다. 하지만 ‘나’를 주재하는 것을 아트만으로 규정하는 우리가 더 웃긴다.
꽃나무가 있다. 그 꽃이 뿌리로부터 땅에서부터 받아 들여서, 눈 귀 코 입이 작동할 때 꽃 향기도 인식할 수 있다. 눈이 작동할 때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 박수소리, 주먹소리, 보면서 들으면서 분별하며 작동한다. 희로애락, 설렘, 실망의 감정이 올라온다. 살아있는 오늘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 치열하게, 간절하게 수행해야
신앙, 수행은 무섭게 해야 한다. 참으로 간절하게 수행해야 한다. 나는 종교적 체험을 하고난 뒤 20년을 침묵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20년 동안 방에 쳐 박혀 있었겠냐? 어록이나 경전 등을 꼼꼼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스님에게 “물속에 담긴 달을 보며 꺼내달라”고 했었다. 그 스님은 내게 말하길, “그 달이 연꽃으로 피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마음이 열려 있으면 머리 굴려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 누가 뭐라 해도 당당하다. 종교적인 체험을 하면 당당하고 넉넉해진다. 자유로워진다. 내가 본 세계가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좋은날이 된다.
다음은 향봉 스님 법석에서 열린 토론의 일부.
도법 스님: 스님의 해석 가운데 ‘코도 입이다’, ‘눈도 입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반대로 원래대로 경전을 해석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향봉 스님: 아무리 유명한 학문이라 해도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있어야 학문이 발전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면 안된다. 나는 단지 다양한 해석을 하고자 했을 뿐이다.
재연 스님: 경전을 대하는 태도, 우리의 약속이 있지 않은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경전의 의미를 국한하지 말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더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바람직하다. 하지만 원래의 것은 꼭 있어야 할 바탕이고 새로운 해석은 그 다음이다.
향봉 스님: <천수경>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다. <천수경> 자체도 위경이니 제대로 이해하려면 확대해석도 필요하다.
화엄학림 학인스님 :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나 아트만 등 향봉 스님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에 대해 잘못된 불교가 전해져 신도들에게 끼칠 우려도 있다.
향봉 스님: 한국은 교학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 같다. 동국대 불교대학도 일본 불교학을 연구발표할 뿐이다. 토시 몇 개 고쳐 그대로 교재로 삼고 있다.
한국 불교학자들은 수직으로 학문을 파고 들지 않는다. ‘정구업진언’에 대한 내 해석은 억지가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런 차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적 이단적 해석이 아닌데도 도법, 실상사 주지스님, 화엄학림 스님 모두 전혀 맞지 않다고 말한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천수경> 문제는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