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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조성에 집착하는 것은 <금강경>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불상 아닌 돌 등을 놓고 절을 짓고 절을 하기도 한다. 불상창고 같은 법당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비 스님은 <금강경>의 눈으로 한국불교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스님을 비롯해 법석에 자리한 사부대중은 천불ㆍ만불의 불상을 조성해 대웅전을 빼곡하게 채운 법당이나 바위가 불상과 엇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고 불사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 한 목소리를 냈다.
#“부처님 말씀 바로 알면 남 도울 수 밖에”
제8 무법출생분(依法出生分):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무비 스님: 불자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이 부처님 가르침을 깊고 넓게 배우고 아는 것이다. 예전에 송광사에서 ‘보왕삼매론’을 복사를 해서 올리는 것을 봤다. 그때 부처님 깨달음을 알리는 일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경전 문구를 한 장으로 정리해 1988년도 봄부터 알리기 시작했다. 불자로서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느낀다면 저절로 희사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법의 실체 바로 알아야”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까?”
무비 스님: 경전의 가르침을 무소설(無所說)의 안목으로 보는가? 진정한 <금강경>은 과연 무엇인가? 한 목숨의 가치보다도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 가치가 더 많다는데, 세상 만사 다 접고 <금강경>에만 매달려야 할 문제 아닌가? 언어 문자로 보는 <금강경> 말고 진정한 <금강경>은 무엇인가?
보살: 교통사고로 왼팔을 못 쓰는 처사가 있었다. “처사님은 왼쪽 팔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오랫동안 안 써서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더라. 그 처사의 마음이 <금강경>을 대하는 우리들 마음 같다.
무비 스님: <금강경>의 진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평생 과제로 삼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해야 한다.
#“법 아닌 법 알아야”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여래는 바른 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무비 스님: 얼마나 바른 말, 참된 말, 이치에 맞는 말, 속임 없는 말을 하며, 양심대로 말하는가? 불교 교리를 사실 그대로 사찰운영과 관계없이 말하는가?
해진 스님(화엄학림): 이는 <금강경>에서 부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불법(佛法)이야 말로 불법(不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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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 조계종단에 종헌ㆍ종법이 있어 조계종이 운영된다. 종정스님, 총무원장스님도 소의경전의 사상과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서 있는데 종단 소의경전의 사상과 정신이 종단에서 실현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상을 버리면 곧 부처”라고 말하면서 온통 상(相)노릇 하는 것이 아닌가. 종정상, 총무원장상, 주지상, 수좌상, 비구상 이런 상을 벗어던져야 한다.
#“마음은 연기 작용의 결과”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에게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있는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무비 스님: 마음의 세계, 마음의 문제에 대해 논해보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구절. 주금강이라 불리던 덕산 스님이 노보살을 만나 떡을 두고 시험한 이야기처럼, 우리 주변에는 그때 그 노보살 같은 숨은 도인이 많을 것 이라 생각한다. 덕산 스님이 대답 못했다고 우리도 못 하라는 법 없으니 의견을 말해 달라.
각묵 스님: <금강경>에서의 마음은 범어 원전에서 ‘마음의 흐름’을 말한다. 마음을 흐름으로 보라는 것은 일체 유위법(有爲法)이 모두 찰나와 흐름(상속)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두 때문에 출가했으나 간화선 공부를 해보니 안 되더라. 철저히 교학적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면 마음은 흘러가 얻을 수 없다. 또, 미래의 마음의 흐름은 오지 않은 것을 말한다.
법인 스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뜻은‘생각의 덫에 갇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써라’라고 해석해야 한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지만 대부분 ‘응무소주(應無所住)’에 머물러 ‘이생기심(而生其心)’에 약하다. 상(相)내지 말라는 말에 갇힌 현실이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두고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는 데 갇혀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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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 화합해 만들어낸 연기작용의 결과다. 이것을 ‘이생기심’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선인도 악인도 연기(緣起)된 것으로 실체가 없다.
#“선악 기준 없어”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진정한 선행(善行)이란 무엇인가?”
무비 스님: 선행이라 생각한 것이 악행이 될 수도 있다.
비구니스님: 법석의 논의가 사회봉사활동에 치우치고 있다. 불교가 수승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데모하고 피 흘리는 곳에 스님들이 모두 나가야 하는 것 아니다. 스님이 해야 하는 선행과 재가자의 선행은 다르다.
의정부 거사: 현대불교신문 구독자다. 현대불교신문을 펼치는 순간, 불교의 신음소리가 넘쳐난다. 한국불교의 스님이 변해야 재가자가 변하고 불교가 변할 수 있다. 스님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불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하니, 옆 사람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무비 스님: 선행을 제대로 못해서 불교가 땅에 떨어졌다. 언론마다 곳곳에서 “불교 이대로 안된다” 라고 하고 있다. 불교가 새로운 각오 다져야할 때다.
#“부처의 모습에 치중 말아야”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여래의 신체적 특징과 그것을 떠난 여래란 무엇인가?”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中道란 무엇인가?”
무비 스님: 신체적 특징을 떠난 여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절실하다. 절집안에서 상(相)에 집착해서 너무 많은 불상을 조성하고 있다. 또 바위가 이렇게 생겼다 해서 보살상이네 부처상이네 하는 것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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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비춰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은 너무나 처참하다. 불교가 망해가는 것은 부처님 말씀인 경전에 기준을 두지 않고 제멋대로 불교 간판을 거는 것이 문제다. 광고비 준다고 불교언론이 신문에 게재해주는 것도 문제다.
천불 만불 등 너무 많은 불상을 조성해 법당을 불상창고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조화롭게 만드는 중도가 필요하다.
제32 관념을 떠난 교화[應化非眞分]
무비 스님: 어떻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줄 것인가? ‘상에 집착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不取於相 如如不動)’는 것은 상을 취하지 않은 행동이 법을 올바로 설하는 자세라는 말이다.
비구니스님: 선(禪)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선을 매도해서는 안된다. 강사가 영어문법을 강의한다면, 선사는 영어회화 가르치는 분이다. 화두 씨름해봐야 소용없다 하지만 안거마다 수천의 납자들이 화두를 들고 씨름하고 있다. 치열한 자기 구도 없다면 회향할 것도 없다.
복지센터 등은 스님이 아니어도 재가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스님들을 현장으로 끌어낼 것이 아니라 “선방 가서 공부하십시오. 바깥 일은 재가자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것이 올바른 불자라 생각한다. 참선 하는 스님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
무비 스님: ‘불교란 무엇인가?’‘출가 수행자란 누구인가?’등 오늘의 한국불교 현주소를 바로 알고, 참된 목소리를 모으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성토하자고 했음에도 말을 아껴 4강이 진행되는 동안 정법불교에 대한 토론이 미진했던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