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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경전에 대한 논란은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무비 스님의 법석은 <금강경>을 강독하며 각 분(分)마다 문제를 점검하며 무르익어 갔다. 스님은 대중과 <금강경> 각 분을 합송(合誦)한 후 점검 ㆍ토론하며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전법에 겸손ㆍ정직해야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무비 스님: “불교는 이렇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했다” 등으로 말하는 불자들이 많다.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며 오만한 태도다. 불교를 강의하고 법을 설함에 있어 우리는 얼마나 겸손하고 정직한가?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바로 문 밖만 나서면 서로 다르게 이야기 한다. 한 사람만 건너가면 본래의 뜻이 와전되는 것이 현실이다. 올바른 불자라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단정 짓지 말고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하고 겸손히 말해야 한다.
#어려운 이웃 바로 돕는 불교 돼야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습니다.”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무비 스님: <금강경>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설해진 것은 고독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살피고자 함이었다. 기수급고독원은 기타(祇陀) 태자와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보시해 지어진 곳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던 급고독 장자처럼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취지에서 <금강경>이 급고독원에서 설해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근본불교라는 아함부 경전도 부처님 열반 후 400여 년이 지나서야 성문화됐다. <금강경> 등 대승불교 경전은 짧게는 500년, 1000년 후 지어진 것도 있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이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해졌다는 것에는 의도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라는 보살정신을 표현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과연 불자들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 수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런 것들도 생각해봐야 한다.
법인 스님(화엄학림 학장):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할 때 보살행이라고 칭해서는 안된다. 노숙자들이 왜 생길 수밖에 없는지 그 고통의 문제에 대해 보다 과학적이고 사회적으로 접근이 있어야 한다. 참선하고 경전 읽고 깨달아 보시하고, 고통에 대한 인식이 낮은 까닭에 사회적 대응방법이라고는 법보시라는 법문이 대부분이며, 현실 사안에 대한 자선사업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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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행을 할 때 보다 개인적ㆍ사회적ㆍ범인류적 문제와 환경 문제 등 고(苦)에 대한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으로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보살행은 자선사업으로 가는 좁은 의미로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 거사: 포교활동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현지에 가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현각 스님(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 종교별 사회복지시설을 보면 불교는 근래 들어서야 체면유지 하는 정도다. 또, 사회복지종사자들은 종교시설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우리가 역으로 이들을 힘들게 하는 사례도 있어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등에 얽매여 그들을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야 할 일이 많다. <천수경>을 교재로 지역 어르신들에게 한글교육을 실시해 큰 호응을 얻은 한 비구니 스님이 한 예다. 요즘 다문화가정이 주변에 많다. 한국문화를 모르고 온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 등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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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소장(밝은사람들): 보살행하면 이타행과 물질복지와 정신복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입장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적 복지다.
일반인이 살다보면 고통의 문제, 실제 생활에서 느끼는 고(苦)는 구체적이고 상세하지만 절에 오면 원칙적인 얘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실생활에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테크닉이 부족하다. 구호가 아닌 치유에 관심을 둬야한다.
진오 스님(청정승가대중결사 의장): 종책 소임자 등에게 목욕봉사 등 봉사에 대한 의무를 부과해 자격조건 제한을 둬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포교종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남지심: 부처님 가르침 정말 좋다. 하지만 가르침만으로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삶이라는 문제에서 아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부처님 바른 법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삶의 실천, 인격의 완성이 따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전법포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 결여되면 부처님 가르침은 완성될 수 없다.
무비 스님: 부처님 가르침이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도법 스님: 지금 이 야단법석의 성격 자체가 <금강경>의 눈으로 한국불교 현실을 진단하고 길을 찾는 것이다. ‘진단’에 초점을 두고 구체적으로 보자.
스님들 가운데 ‘깨달음병 환자’, ‘부처병 환자’, ‘견성성불(見性成佛) 환자’가 많다. 이들에게 보살행을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하고 부처된다는 확신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법주스님(무비 스님)이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보살행을 하면 성불한다, 부처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면 그 다음 문제는 저절로 풀릴 것 같다.
해인사는 ‘현대의 국민선사’라 불리는 성철 스님이 심오하고 고준한 법을 가르친 곳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사하촌 주민들은 스님들을 불신하고 기피하고 불만을 갖고 있었다. 조계종 종립선원인 봉암사를 보자. 근래 들어 사찰의 외형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해졌지만 주변마을은 무참하게 버려졌다. 한국불교는 중생의 삶을 돌보는 근본적인 마인드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비 스님: 아픈 지적에 한 마디 덧붙이면, 어느 절에 주지 스님이 새로 부임했다. 짠 스님인데 설을 맞이해 쌀 90포대를 준비해 한 동네는 40포대, 옆 동네는 50포대를 나눠졌다. 주민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스님들이 어디 잘못된 것 아닌가” “다른 곳에 갈 쌀을 잘못 전한 것 아닌가”하는등 여러 억측이 난무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 동네가 바로 사하촌이었다.
봉암사ㆍ해인사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 고준한 성지가 있더라도 중생들에게 회향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그것이 소승(小乘)이다.
성도(成道)와 견성(見性)은 옆 사람을 볼 수 있고 살필 수 있는 안목이다. 사찰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주변 사하촌부터 보살필 줄 아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불돼 있는 존재다. 보살행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성불하겠다는 간판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 진정 성불하고 싶어서 앉아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정말 성불할거면 과연 그렇게 살 것인지, 불교계 치부이지만 이제는 다 깨놓고 얘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