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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은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통한 현실고민을 주제로 8월 14일 오후첫 문을 열었다. <금강경>이 조계종 소의경전이기에 앞서 현대사회의 불교에 적합한지, 사부대중은 소의경전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등이 주요논제가 됐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대강백 무비 스님(움직이는선원 조실)은 야단법석 첫날부터 이틀간 4강에 걸쳐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 살펴본 수행지침 점검과 반성’을 주제로 법석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는 ‘천불ㆍ만불로 만든 불상창고 같은 법당’,‘1029일 천도재는 무속행위 같은 일’,‘종정 상(相) 총무원장 상도 버려라’는등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고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무비 스님은 “선을 표방하는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지만 <금강경>이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으로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금강경>에 보살정신을 세상에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 미약한 것 등 <금강경>이 조계종 소의경전으로 정해질 때는 소의경전으로 손색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사회변혁에 따라 불교부터 발전하고 변화해가야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스님은 “불교가 할 일은 보살행이다. <금강경>에 보살정신이 담겨있으나 다른 경전에 비해 미미하다. 불교는 변화ㆍ발전하는 종교이다. 과감하게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도법 스님은 토론을 통해 “무비 스님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까 하고 놀랐다”면서 “무비 스님이 한국불교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했기 때문일 것”이라 말했다.
이어 도법 스님은 “나도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다. 부처님 열반 후 500년 후 등장한 대승불교는 당시로는 천지가 개벽할 혁신적인 변화였다. 조계종단도 오늘의 현실에 응답하고 21세기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려면, 소의경전을 바꾸는 문제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열어놓고 대범한 입장에서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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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의 소의경전 자격(?) 논란에 활발한 토론이 오갔다. 다수의 재가자가 무비 스님의 문제제기에 동의한 반면, 일부 스님 중에는 무비 스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철오 스님(구룡사)은 “<금강경>이 완전하지 않다면 완성된 경전은 무엇인가? 행사가 ‘중생제도, 동체대비’를 주제를 달고 계속 몰아가는데 깨달음 없이 동체대비가 가능한가? <금강경>은 소의경전으로도, 중생제도로도 부족함이 없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자연히 중생제도로 이어진다”고 반박했다.
이에 무비 스님은 “완전한 경전을 꼽으라면 <법화경>을 들 수 있다. <법화경>은 불자로서 사회에 어떻게 회향할 것인지를 강조하고 모든 것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굳이 소의경전을 한 권만 선택할 이유가 있느냐”며 “조계종의 소의경전을 선택하라면 대승경전과 선종어록 등이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무비 스님의 설법 전문.
1. 불교는 변화의 종교다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종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종교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부단한 혁신과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안으로는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혁범성성(革凡成聖)을 목표로 하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고, 밖으로는 이 세상의 예토(穢土)를 정토화(淨土化), 불국토화(佛國土化)한다는 원력실현(願力實現)을 지상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서양의 물질문명이 들어와서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놀라운 변화와 혁신(革新)을 가져왔지만 아무리 훑어보아도 중생이 부처가 되는 혁범성성이나 예토의 불국토화와 같은 표현이나 그와 유사한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꾀하고자하는 그 혁신과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를 족히 짐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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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불교이기에 초기불교에서 세존의 열반만을 기다리던 한 무리가 있어 세존이 열반에 들자마자 교단의 혁신을 꾀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교리나 사상이 아닌 승가생활의 규범인 서릿발 같은 계율의 문제에 제동을 걸고 혁신을 모색한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부단한 변화를 모색해 온 교단은 드디어 진보적 성향인 대중부와 보수적 성향인 상좌부로 나뉘더니 급기야는 20여개 부파로 쪼개졌으나 그와 같은 와중에서 실로 불교 그 자체에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대중부나 상좌부나 당시 출가자들은 승가집단만을 위한 고착된 사고 때문에 정토화니 불국토화니 하는 사회적인 책무에는 뒷전이었다. 즉 바깥세상의 어려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불교가 살아있는 전통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도 변화와 성장과 발전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로 기원전 1세기경 대중부 속에서 대승불교라는 급진적 교파가 생겨나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승불교란 불교내부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이었으며 출가자와 재가불자 모두 수용하려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이며 반란이며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하는 실로 큰 수레였으며, 부처님의 진정한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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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2600여 년의 시간은 흘렀지만 이와 같은 전통을 계승해 온 오늘의 우리들이다. 실로 자랑스럽기도 하려니와 그 책임과 의무도 또한 무겁기 그지없다. 돌이켜 선사들의 자취를 살펴보면 자신이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으며 지금 이 시대의 불교 상황도 참으로 암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저의 관견(管見)으로 더듬어 본 불교 그 자체는 너무나도 위대하고 한편 분에 넘치기에 차마 오늘날의 불교 현실이 눈에 밟혀 병든 노구지만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분의 지사(志士)들이 자신과 그리고 불교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도모해 보고자 노심초사하기에 미력이나마 운력(運力)에 동참한 것이다.
그들은 몸부림치며 전 국토를 걷기도 하고 삼보일배를 하면서 실로 무엇인가를 어떻게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 걸음은 어제에 그랬듯이 오늘도 또 내일도 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수행이든, 불교의 정화든, 아니면 단순한 방선시간의 포행이든, 그렇게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비록 한낱 꿈에 불과할지라도 이상적인 불교, 세계불교의 모델이 될 만한 불교를 위한 불사가 되고, 오늘의 불교와 미래사회를 선도할 미래불교를 위한 길이 되었으면 한다. 나아감은 곧 변화요, 혁신이요, 그것이 곧 불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거를 마련하고 그 근거에 의해 논의하는 것이 옳다 생각돼 <금강경>으로 이번 자리를 돌아보게 됐다. 마침 조계종에서 표준 <금강경>이 편찬돼 처음으로 함께 읽으며 공개강의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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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 정해진 배경
<금강경>은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이다. <금강경>이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모든 불교도는 <금강경>의 정신에 의하여 수행과 전법과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눈으로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여 수행과 전법과 삶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일치와 불일치를 가려내어 그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시도해본다. 그것이 곧 정법불교(신 대승불교)를 모색하는 운동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정법불교(신 대승불교)를 모색하는 운동이라면 사실 <금강경>으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금강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또는 제일 각광받는 중요한 경전으로 정해지게 된 배경은 선불교의 역대 선사들이 특별히 애독한 관계로 우리나라에서 <금강경 오가해>가 편찬되어 전통 교육기관의 교과서로서 오랫동안 읽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사들이 그처럼 특별히 좋아한 이유는 조계종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 6조 혜능 선사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종파로 변천해 왔다. 사실 선불교는 대승불교가 쇠퇴하면서 생긴 불교다. 엄격하게 따지면 선불교가 아니라 그냥 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주장이 적지 않다. 선불교는 불교가 중국에 건너와서 기존의 민중종교인 유교, 도교와 만나면서 탄생한 매우 특수한 정신세계다. 한편 노자와 장자, 중용, 대학을 섭렵한 중국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발전한 대승불교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그다지 특별한 매력은 주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불선을 아우르며 그 모든 것들의 상위에 자리하게 된 선불교의 선사들은 하늘을 찌르는 고준한 의식과 거의 도교의 도사들과 유사한 간소(簡素), 탈속(脫俗), 자연(自然), 유현(幽玄), 고고(枯孤), 정적(靜寂), 변화(變化), 부동(不動, 八風不動), 무소유(無所有) 등 삶의 모습으로 기존의 불교도들에게 태풍과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나는 이것을 선의 8대 정신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선불교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래되면서 선사들이 이미 즐겨 읽던 <금강경>이 언제부터인가 소의경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금강경>은 대승불교가 완전하게 발달하기 이전 초기대승불교에 해당하는 경전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불교 즉, 이상적인 불교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금강경>을 이상적인 불교, 완전한 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도 다시 점검해 봐야할 일이다. <금강경>을 포함한 위에서 보인 선불교와 선사들의 삶에서는 대승적 보살정신으로 예토의 정토화에 대한 노력을 찾아보기란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의해 이상적인 정법불교를 모색하기란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우리는 우선 소의경전인 <금강경>에서 수행지침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될 만 한 점들 몇 가지를 대강 찾아 초록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들과 함께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