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서부지방법원 2009가합1004호 사건에 대해 생명연장장치제거에 찬성하는 배심원 15명 반대 5명의 의견이 제출됐으므로, 배심원들의 의견을 참조해 생명연장장치제거를 인정합니다. 탕탕탕!”
재판관이 20명의 배심원들의 심사숙고한 결정을 수렴해 의사봉을 치며 판결을 내린다.
6월 23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존엄사를 맞이한 김모 할머니(77)가 17일째 자발호흡을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은평노인종합복지관(관장 고재욱)이 어르신 모의재판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복지관은 7월 9일 2층 강당에서 복지관 어르신 200여 명을 모시고 어르신 모의재판 ‘품위있는 죽음-존엄사’를 실시했다.
황영숙 팀장은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존엄사 문제를 보고 자신의 삶을 불필요하게 연장하지 않고 인간적이면서도 존귀한 죽음을 확보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에 복지관 이용어르신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고 사회적합의가 도출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자 모의법정을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2주의 준비기간을 걸쳐 담당교육자와 대본을 만들어 연습한 어르신들의 재판과정은 어색함이 없었다. 재판과정을 지켜보던 어르신들도 원고ㆍ피고측의 공방을 보며 공감 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등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피고측 변호인은 “존엄사의 의도는 이론적으로는 훌륭하나 생명경시 풍조로 인한 현대판 고려장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환자들은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죽어줘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존엄사를 반대했다. 이에 반해 원고측은 “병을 고치지 말고 방관하자는 것이 아니라 의학도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환자가 편안하게 삶을 마감하는 게 당사자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변론했다.
50여 분간의 공방 끝에 방청 어르신들은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기 전 나눠 받은 ○, × 표시의 종이를 들었는데 이중 142명이 찬성(○), 8명이 반대(×)를 들었다. 어르신들 중 다수가 존엄사를 찬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모의재판 후 실시한 설문조사결과에서 참석 어르신들 중 90.9%가 ‘존엄사를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77.2%가 존엄사에 대한 법 제정 및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 ||||
이날 모의재판의 재판장 역을 맡은 장정하(여ㆍ77) 어르신은 “오랜시간 병상에 누워 호흡기로 연명하며 사느니 곱게 세상을 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며 “자식들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자식들이 효도할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박상설 어르신(남ㆍ76)은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3년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당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이라 빨리 눈 감았으면 했다. 하지만 돌아가시고 난 뒤 잘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후회스럽다”며 “부모님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다수의 어르신들이 경제적 문제와 삶의 질 문제를 앞세워 존엄사를 찬성하고 있다.
고재욱 관장은 이에 대해 “법이 한 사람의 생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또한 생명의 가치를 효율성으로 생각해 취급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어르신들이 결국에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존엄사를 찬성하는데 이는 노인자살과 같은 사회적문제와도 연결된다. 반드시 국가에서 적극적 방안을 마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이럴 때 일수록 종교인들의 역할이 중요한데 불교계에선 아직까지 존엄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은 “자식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까…”, “곱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불교계가 이런 어르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 그들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인복지포교에 심혈을 기울여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