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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탄생 500주년 ‘장로교의 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27개 한국 장로교단 참여 대규모 집회



장 칼뱅((1509~1564).

2009년은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이 탄생한지 5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장로교회의 창설자이기도 한 칼뱅의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내 개신교 단체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는 6월 21~22일 대치동 서울 교회에서 ‘칼빈과 한국교회’이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 및 기념음악회를 열었다. 또한 칼뱅의 생일인 7월 10일은 ‘한국 장로교의 날’로 선포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27개 한국 장로교단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된다.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지난 4월 서울교회 인근 대치동 삼성로 서73길을 명예도로 ‘칼빈길’로 추진하고 있어 불교계와 개신교계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있다.

이같이 칼뱅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을 정도로 칼뱅의 탄생은 개신교인들에게는 의미가 크다.

칼뱅은 훗날 칼뱅주의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달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중세의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 독일에서 루터가 1517년 을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고 ‘95개조 반박문’을 발표를 했을 당시 프랑스 북부 지방 출신의 칼뱅은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해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기도 한 그는 1533년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는다. 이후 그는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해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를 저술했다. 이 무렵에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인간의 구제는 신에 의하여 미리 정해져 있다’는 내용의 ‘예정설’을 주장한다.

칼뱅은 자기의 직업에 근면, 성실하게 종사할 것을 강조, 이는 중산 시민 계층에게 받아들여져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러한 칼뱅 교도를 영국에서는 청교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이라고 불렀다.
이나은 기자 | bohyung@buddhapia.com
2009-07-10 오후 7: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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