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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당 세웅 선사 입적...9일 용흥사서 영결ㆍ다비식



현대불교 자료사진


토굴에서 평생을 정진해 온 조계종 원로 태원당(太然堂) 세웅 스님(世雄ㆍ상주 갑장사 주지)이 7월 5일 세수 84세로 입적했다. 법납 54세.

세웅 스님은 “시주(施主)의 은혜가 수미산(須彌山) 보다 무거우니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입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향소는 경북 상주시 용흥사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7월 9일 오전 10시 30분 ‘조계종 원로 태연당 세웅대선사 문도장’으로 거행되며, 다비식은 용흥사 연화대에서 엄수될 예정.

1925년 태어난 스님은 1956년 서운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은사로, 고암 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수행생활이 일반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선승인 세웅 스님은 갑장사 주지 소임 유일한 이력으로 남아있다. 1968년부터 2000년 3월까지 지낸 갑장사 주지 소임도 스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절에 스님이라곤 세웅 스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종무행정상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 상좌에 주지 자리를 맡겼음에도 조실이나 회주 등의 자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조실로 앉게 되는 순간 모든 공부가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주사암연합회 고문 자리까지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다.
평생 동안 갑장사를 떠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스님은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며 오후불식을 하며 대웅전 인근 조그마한 토굴에서 끊임없이 정진했다.

갑장사 (054)533-3474, 용흥사 (054)533-7728
다음은 본지 311호(2001-03-21)에 게재된 기사 전문.



【가까이서 뵌 큰스님】세웅스님 <상주 갑장사>
“어떤 일이든 욕심이 화 부른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입(言)이나 손(文)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존경 받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며 ‘행위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암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투철한 정진력으로 지금까지 수행자의 사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두가 ‘산 법문’으로 귀감이 되는 수행자는 드문 현실이다.

올해 초 모 사찰 주지 스님으로부터 상주 갑장사에 수행자 본분사에 철두철미한 선승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스님은 수행과 계율에 철저할 뿐 아니라 수좌들로부터도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진짜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그 스님의 법명은 세웅 스님.

기자는 스님을 만나기 위해 사전 취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세웅 스님을 아는 사람은 선방에서 오랜 수행을 한 몇몇 수좌와 본사인 직지사 그리고 상주지역 불자들 외에는 드물었다. 이들도 대부분 ‘스님을 오랫동안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선승’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스님은 언론의 인터뷰는 물론 사진촬영도 일절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갑장사 거사회에서는 스님의 개인 사진이 없는 관계로 영정사진 마련을 위해 회의까지 따로 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두문불출하시며 정진에 힘쓰시는 스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스님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고민이 생겼다. 하지만 요즘처럼 힘겨운 시대에 부처님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하고 계시는 세웅 스님의 수행생활 편린을 소개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은 물론 신행의 사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상주 갑장산(806m) 정상 부근에 위치한 갑장사로 무조건 떠났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주시 지천동 산 5번지. 갑장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 없이 살라하네…”라는 유명한 싯구를 남긴 나옹 혜근 선사가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상주시내에서 승용차로 20여분만에 도착한 곳은 진감 국사가 창건했다는 비구니 선원 용흥사. 이곳부터 갑장사까지는 걸어야 한다. 잔설이 남아 있는 산길을 걷기 시작한지 50여분만에 도착했다. 부처님께 참배하고 스님을 찾으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거사가 “어디서 오셨는데 이렇게 일찍 왔느냐”며 반갑게 맞이한다. 그 거사는 기자를 대중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과일과 떡을 내놓는다. 갑장사에 큰스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하러 왔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갑장사 스님이 어떤 분인지 여쭈었다. 10여분 동안 거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작업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한 노인이 들어오더니 “왜 손님들에게 음식을 그렇게 대접하세요? 다시 상을 차려 드리세요”라고 나무라시고 나가신다. 그런데 문을 여닫는 모습이나 나가시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닫았다. 어찌나 조심스러우신 지 그냥 쳐다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어떤 분인지 궁금해 거사에게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저 분이 바로 세웅 스님이라고 한다. 세웅 스님은 예불과 기도 시간 외에는 항상 작업복 차림을 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사찰의 모든 일들을 손수 하시기 때문이다. 텃밭을 일구는 농사일부터 사찰의 크고 작은 보수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스님은 몇 년 전 태양열 보일러 설치 등의 큰 작업도 직접 했을 정도다. 스님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사찰의 울력을 하다보니 늘 작업복 차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 선종의 청규 창시자 백장 스님의 ‘일일부작 일일불식(日日不作 日日不食)’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문득 수 십 년 전 일간지의 한 기자가 하동 칠불암 선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선승을 취재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연은 이렇다. 칠불암에 도착한 기자는 군불을 지피고 있는 노인에게 “이곳에 두문불출하시는 큰스님이 계시다는데 한번 뵈러 왔습니다.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군불을 지피는 노인은 이곳엔 그런 스님이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결국 그 기자는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야 군불 지피는 스님이 바로 큰스님임을 알고 아차 했다는 것이다.


대중방에서 나간 사람이 세웅 스님이란 사실을 알고 좇아 나갔지만 스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스님을 다시 뵌 것은 2시간여가 지난 사시 마지 시간이었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들어오신 스님의 첫 인상은 여느 스님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신도들에게 일일이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스님 모습에서 부처님의 미소와 같은 자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불전을 향하자 법당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 사이로 나지막한 염불이 시작됐다. 세수 77세의 노스님이기 때문에 염불 소리가 그렇겠지 라는 생각은 선입견이었다. 스님의 염불소리는 서서히 높아지더니 법당은 물론 계곡까지 멀리 울려 퍼질 정도로 힘이 있었다. 젊은 사람 못지 않았다. 게다가 스님은 이날 갑장사를 찾은 30여 신도들의 축원카드에 적힌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주셨다. 간혹 읽기 난해한 글자가 있으면 종무를 보고 있는 보살을 불러 확인한 후 다시 축원해 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스님의 지극 정성으로 인해 사시 마지 기도는 여느 사찰에 비해 두 배가 걸렸다. 신도들은 “스님은 늘 우리가 미안해할 정도로 자상하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해 주신다”며 입을 모은다. 사시 마지를 마친 스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니 스님은 “기도를 또 해야 한다”며 명부전으로 향하셨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스님은 해질 녘까지도 명부전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한 보살이 다가와 “기자님들께서 오신 걸 알고 일부러 안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인터뷰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이날 점심공양도 거르시고 약 5시간 이상을 독경 삼매에 드셨다. 그것도 80에 가까운 노스님이 말이다. 신도들은 “스님은 웬만한 젊은이들을 능가할 정도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고 계시다. 한마디로 초인적이라 할 수 있다”며 “그것은 오랜 세월 지속하신 수행 때문”이라고 말했다. 갑장사에서 만난 박인석 씨(상주법우회 부회장)는 “세웅 스님은 참선과 울력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면서도 법상에 올라 법문은 절대 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신도들이 스님께 법문을 해달라고 하면 늘 “내가 아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법문을 하겠는가. 나는 법문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갑장사에는 여느 사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법문 법회가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법문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갑장사에 가면 많은 법문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 스님의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든 것이 신도들에겐 산 법문이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불성의 작용임을 신도들에게 몸소 보여주신다. 갑장산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면서 밝은 선지(禪旨)와 산 법문으로써 불자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고 있다. 즉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선의 구현이며, 청정율의(淸淨律儀) 그 자체인 것이다. 스님은 ‘불교가 무엇입니까’, ‘선(禪)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아예 말문을 열지 않으신다. 그래서 신도들이 터득한 ‘법문듣기 비법(?)’이 있다. 생활에서의 고민을 묻는 것이다. 그러면 스님은 그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하신 여러 방편을 토대로 자상한 가르침을 준다. 그래서 갑장사의 법회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늘 열리고 따뜻한 문답이 오간다. 스님은 ‘무욕(無慾)의 삶’을 자주 강조하신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욕심은 마(魔)가 된다는 것이다. 가정은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란 것이다. 특히 깨닫고야 말겠다는 지나친 수행 욕심과 많이 알려고 하는 지적 욕심을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화 하나. 얼마 전 상주시내에 거주하는 한 신도가 개업 불공을 하며 20만원을 갑장사에 보시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들은 스님은 그 신도에게 돈을 그대로 되돌려 보냈다. 보시를 많이 한다고 사업이 번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갑장사에서도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란 것이 그 이유다. 스님은 재물이 많아지면 게을러지고 욕심도 많아져 수행에 마가 된다고 경계하시며 보시에 대해서조차 엄격하다. 결국 보시는 어떤 식으로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 깃든 순수하고 지극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어떤 때는 스님이 신도들에게 보시금을 주기도 한다. 사찰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공양주 보살과 거사 그리고 스님만이 살고 있는 갑장사에 얼마 전 컴퓨터 한대가 들어왔다. 갑장사를 찾는 불자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변화다. 약 8천 여장의 신도카드를 관리하기 위한 긴급 처방이다. 하지만 시스템 구축이 문제. 할 수 없이 컴퓨터를 잘 아는 신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스님은 그 신도가 밤새워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하루는 고생한다며 정성껏 마련한 보시금을 내밀어 그 신도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갑장사에 신도들이 많이 늘어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스님의 수행력 때문이다. 물론 신도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수행의 길을 묻는 스님들과 나름대로의 투철한 수행을 오랫동안 해온 재가 불자들도 많이 방문한다.

80년대 초 등산을 왔다가 스님을 알게돼 지금까지 20년 동안 수행지도를 받고 있다는 김종재(상주공고 교사) 씨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스님을 뵙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며 “무엇보다 수행의 길을 쉽고 자세하게 지도해 주신다”고 말한다. 김 씨가 스님을 만나기 전 화두로 삼아 온 것은 ‘나는 누구인가’다. 하지만 수없이 참구해 봐도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의문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스님의 ‘컴퍼스 강의’ 덕택이다. 답답해하는 김 씨에게 스님은 하얀 종이 위에 컴퍼스로 둥근 원을 그려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원을 그리는 중심 축은 보려 하지 않고 모두 둥근 원에만 집착한다. 무상(無常)한 참된 나는 보려하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허상을 자기의 본래 보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허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것이 참된 자신을 찾는 지름길이다.” 스님은 수행의 길을 묻는 수행자들에게 화두를 권하거나 좌선작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바르게 사유하는 것(正思惟)을 먼저 가르친다. 이것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 제1의 수칙이며 마지막까지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유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화두를 참구하라는 것은 의심도 안 되는데 억지로 참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것이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죽음은 곧 삶의 결산이다’며 절제된 말과 행동으로 자신과 보이지 않은 싸움을 하는 수행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남장사 주지 성웅 스님도 “상주 지역의 스님과 신도들은 세웅 스님을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웅 스님을 가까이서 뵌 불자들은 한결같이 “갑장사는 경제적으로는 비록 풍족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사찰이다”며 “그것은 세웅 스님과 같은 선지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옛말에 산무도인 조무양신(山無道人 朝無良臣)이란 말이 있다. 산중에 도인이 없으면 배회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고, 조정에 신하가 없으면 백성은 시달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의 불교가 지금까지 명맥을 꾸준히 잇고 있고, 21세기의 대안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세웅 스님과 같이 두문불출하며 수행을 끊임없이 탁마하는 선지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글=김중근 기자
(gamja@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세웅스님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선승
갑장사 주지 소임 유일한 이력


세웅 스님은 이력이나 수행생활이 일반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선승이다. 1925년 태어난 스님은 1956년 서운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은사로, 고암 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스님의 유일한 이력은 1968년부터 2000년 3월까지 지낸 갑장사 주지 소임이다. 이것도 스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갑장사에 스님이라곤 세웅스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종무행정상 주지 소임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해 주지 자리를 상좌에게 맡겼음에도 조실이나 회주 등의 자리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조실로 앉게 되는 순간 모든 공부가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주사암연합회 고문자리까지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스님은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며 지난 40여 년 동안 갑장사를 떠난 적인 한번도 없다고 한다. 스님은 오후불식을 하며 현재 대웅전에서 100m 떨어진 산자락에 조그마한 토굴을 마련해 정진하고 있다.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09-07-06 오후 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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