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9년 5월 29일
장소: 양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교육장
주최: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강사: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
주제: “여성, 승만경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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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임으로서 깨달음의 길을 모든 사람에게 열었다. 이러한 전통은 인도사회에 변혁을 유도했고, 이후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며 한국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는 한국 여성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오늘날 여성을 교단 내에서 소외시킨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평등정신 하에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균형 있는 발전뿐만 아니라 인류의 행복의 시작은 부처님 근본정신에 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5월 28일부터 11월 26일까지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도법 스님과 함께 하는 ‘여성, 승만경을 말하다’ 강연을 연다. 도법 스님과 함께 여성과 불교의 관계를 재정립해보자.
#불교는 이 세상 존재들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그 존재들을 빛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그 존재들이 스스로 빛나게 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불교를 비롯해 불교는 어떻습니까?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승만경을 공부한 적도 없고, 여래장 사상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하지만 왜곡된 불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패배의식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 개인을 벗어나 공식적인 체제에서 버젓이 이러한 부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조차 힘듭니다.
재가불자가 주인공이 된 경전으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남성 재가자인 유마거사가 주인공인 <유마경>과 여성 재가자가 주인공인 <승만경>입니다.
이번 강연회에서는 <승만경>을 통해 지금까지 평가절하 받아왔던 불교교단 내에서의 여성을 재조명하고,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한국불교는 여성 불자가 아니면 지탱할 수 없습니다. 여성 불자들이 승만 부인과 같은 역할로 깨어나 정법을 실천해야합니다. 여성 불자들이 이 역할을 하지 않고는 한국불교 오늘과 미래 일을 풀어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불교는 그동안 출가 중심으로 흘러왔습니다. 출가와 재가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주변의 많은 불자들은 불교는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해외 유명대학을 나온 스님들도 불교는 만만치 않다고 토로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친근감을 느끼는 종교만이 살아남습니다.
불교에서는 여실지견이란 말이 있습니다.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보고, 존재의 실상을 사실대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나무둥지 밑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 바깥으로는 나무가 존재하기 위한 태양과 달과 바람 등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땅속을 보면 흙과 미생물 등 온 그루가 다 참여해서 나무와 환경을 만듭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것을 보는 것이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나무, 뿌리만 본다면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보면 실상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중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을 귀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실지견은 이와 같이 눈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고 귀있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지금 여기 현실에서 이뤄집니다. 10년 뒤 이뤄지거나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중도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데 왜 그것이 어렵겠습니까. 현실에서 이뤄지는데 왜 불합리 하다고 의심을 하게 됩니까.
저는 불교를 어려워 할 이유도, 의심해야 할 이유도, 좌절ㆍ절망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불교 얘기를 들으면 모두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매우 심오하고 거룩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얘기 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좌불와를 해야 한다. 3000배, 만 배를 하지 않으면 접할 수조차 없다. 중생은 모르고 깊은 경지에 가야 알 수 있다. 불교는 사람들을 바보 멍청이로 보고 있습니다.
왜 경전이 만들어졌겠습니까. 부처님이 왜 법문했겠습니까. 부처가 된 사람들만 알아들으라고 만들어진 불교가 아닙니다. 중생들을 잘 이해시켜 깨달음에 까지 가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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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장좌불와 해야 알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이 한국불교에서 생활화 돼 있습니다. 이것을 깨야 합니다. 저는 오늘 강의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부숴가며 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겁이 없어야 합니다. 상식과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할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지금 함께 이해 할 수 있도록 경전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연등축제가 열렸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셔서 하신말씀은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보통 부처님의 출가는 생노병사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다고 하지만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깨닫기 위해 출가하셨습니다.
그 인생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즉, 유아독존답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세상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지금 여기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국가보다도 종교보다도 인연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여기 ‘나’입니다.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만큼 다른 너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귀한 존재이고, 너는 너에게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무엇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살기 때문에 주체적 존재로 살아가야합니다. 자기 삶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세상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입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행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내 인생의 이웃이요 내 인생의 동반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타불일불이(自他不一不二)를 말씀하셨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을 같이 보십시오. 양손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한 몸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용맹 정진해야 알 수 있습니까. 불교는 이런 것입니다. 본래부처는 본래면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화엄경과 법화경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본래부처를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부처답게 살면 됩니다. 본래부처이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것을 심우도에서는 소타고 소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업은 아기 3년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업은 아기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100년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기 찾는 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습니까. ‘아! 내가 소를 타고 있구나’, ‘내가 얘기를 엎고 있구나’ 깨닫고 행하면 됩니다. 절과 경전, 장좌불와 아무것도 안 해도 좋습니다. 이를 선사들은 세수하면서 코만지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물이 있어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있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마시면 살아납니다. 이러한 사실은 남자도 여자도 차이가 없습니다.
목말라 물을 마시면 10년 뒤 효과가 날까요, 지금 실현될까요. 바로 증명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것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승만경>에서는 승만 부인은 부모님인 파사익 왕과 말리부인은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도독원에 머무르고 계실 때 편지로 부처님의 공덕을 전했습니다.
“내가 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에 일찍이 없는 것이니, 이처럼 진실한 분이라면 마땅히 닦고 공양해야 한다.”
부모님을 통해서 부처님 얘기만 듣고서도 감동한 것입니다. 우리 불교신자들은 스스로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신라 선덕여왕은 승만 보살의 원력으로 당시 삶을 산 인물입니다. 한국여성불교계가 승만 보살 운동을 벌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