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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울음소리가 화계사 앞마당을 뒤흔드는 오후, 영가를 위한 염불봉사를 14년째 해 오고 있는 최복천씨를 만났다. 14년 동안 염불봉사 횟수가 1400회가 넘는다고 하니 한 달에 15번은 봉사를 다닌 셈이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서너 번씩 안치실에서 염불을 올리기도 했다고 하니 굳은 신심과 보살정신이 없으면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이다. 최복천씨는 빈소에서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치실에서 직접 망자와 대면하고서 염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도권과 전남, 경북, 충청도 지역 등 전국을 돌며 60여 곳의 장례식장과 상가에서 염불봉사를 했다. 여러 가지 봉사활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가를 위한 염불 봉사를 택한 것이 궁금하여 여쭈었다.
“96년 서울 화계사 신도회장직을 연임 후 물러나면서 이제 내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여생을 보낼까’ 고민을 했어요. 그런 차에 ‘불자들 중 나이 들어서, 또는 죽기 직전에 개종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종단에서 장례문화에 대한 대비가 없으면 그나마 노년층 불자마저 잃겠구나’ 하는 위기감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장례의식 염불’을 살펴보니 내 근기와도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7년도 불교자원봉사연합회에서 원왕생(시다림의식) 교육을 받았고, 그것이 인연이 돼 염불포교를 시작하게 됐어요.”
98년 제3회 포교사가 된 후 불교어산작법학교 교장인 인묵스님(봉선사 주지)에게서 초급과 고급반 교육을 받고나니 염불포교에 자신이 좀 생기더란다.
“망자와 마주할 때면 ‘이 다음에 죽으면 나도 저런 모습으로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 아닙니까? 그런데 태어날 때는 날짜와 시간이 되면 순서대로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으니 우린 항상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란 들이쉰 숨을 내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요, 내쉬면 사는 것 아닙니까?”
최복천씨의 염불봉사는 언제 어디서 연락이 올지 모르니 항상 대기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모임 하나 없다고 한다. 혹 사람들과 약속을 하더라도 “만약 염불봉사가 있으면 이 약속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단서를 붙인단다. 최복천씨의 일상에서 염불봉사는 항상 1위로 꼽히는 중요한 일이란다.
최복천씨는 젊어서부터 운허 스님, 관응 스님, 탄허 스님, 경산 스님, 지오 스님 등 큰스님들의 법문을 많이 들었을 뿐더러 49재도 많이 참석해보았다. 스님들이 행하는 49재를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은연중 배우게 되었다.
최복천씨의 보살행은 굳건한 신행생활에서 연유하는 것이기에 공부이야기를 여쭈었더니 ‘숭산 큰스님으로부터 오랫동안 참선지도를 받았으며, 큰스님과 독참해 점검을 받기도 했다.’고 답했다. 숭산 큰스님으로부터 들은 법문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법문이 있단다.
“이 몸뚱이는 렌트카다. 다 쓰고 나서 폐차를 시키고 나면 새 차를 받아야 하는데, 티코를 받을 것인가, 그랜저를 받을 것인가는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운전사이듯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다.”
그는 ‘태어남은 한조각 그림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다고 하지만, 현생의 업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하니 잘 살아야지요’ 라고 덧붙였다.
“흔히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지만 사실 우리는 평생에 지은 업을 지고 저 세상으로 갑니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거짓말을 못한다고 해요. 그리고 업경대에 자신이 일생동안 지은 업이 영화처럼 그대로 화면에 나타난다고 하니 두렵잖아요.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선업(善業)을 지으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작은 일이지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염불봉사 14년 동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단다.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자연사(自然死)가 많았는데, 지금은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하여 교통사고를 비롯한 각종 안전사고와 자살 그리고 불치병으로 죽은 영가 등이 많다. 특히 가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환경이 좋은 않은 영가와 인연을 갖게 되면 더욱 간절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염불하게 된다. 염불봉사를 통하여 언제 보람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두렵고 초조한 마음으로 있던 유가족들이 염불을 해주고 나면 아주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생각나는 유가족이 있어요. 영가님은 수십 년 동안 날마다 화계사를 오르내렸지만, 세 명의 아들은 전부 천주교 신자였어요. 그렇지만 아들들은 생전에 아버지가 불자였기에 불교 방식대로 장례식을 하고 싶다면서 염불을 청하더군요. 화계사에서 49재까지 치루고 나서 그 아들들을 만났는데 ‘저희들 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데요. 그때 정말 제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어요. 염불봉사는 살아있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
최복천씨는 그동안 자발적으로 동참해 준 많은 포교사와 불자들이 있었기에 이러한 봉사활동이 가능했음을 강조했다.
2005년 겨울, 염불봉사를 위하여 새벽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길을 가다가 봉고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발목 골절과 머리에 여섯 바늘을 꿰매는 상처만 입고 살아났단다. 최복천씨는 이를 두고 ‘불보살님의 가피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 그 와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발에 깁스를 한 상태에서 장례를 모시게 되었고, 어쩐지 크나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때 염불봉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느냐고 했더니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앞으로 더욱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온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염불하고 나서 조가(弔歌)를 부르면 상주들이 감동을 받아 통곡하는 모습을 더러 보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음성공양 포교의 중요성을 실감한단다. 그래서 최복천씨는 어떤 포교보다도 염불포교가 우선시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어린이, 청소년, 군포교 등 많은 분야에 포교 활동이 있지만 염불포교 보다 더 시급한 포교는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포교는 그래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염불포교는 사람이 죽고 나서 3일 안에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을 해야 하니 너무나 시간이 짧아요. 장례식을 치루는 3일이 지나면 그 영가와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이다 보니 참으로 다급합니다.”
주변에서는 칠순이 넘었으니 이젠 건강을 생각하여 쉬라고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염불포교를 하겠다는 강한 원력을 비쳤다. 인터뷰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복천씨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염불봉사를 요청하는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