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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불교교육의 선각자 용봉(龍峰) 대종사 금당(錦塘) 이재복 선생(1918~1991). 용봉 스님은 일생동안 불교, 교육, 문학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룬 선지식이다.
1918년 충남 공주 계룡에서 출생한 스님은 생후 6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보통학교와 중등교육을 받았다.
스님은 15세(1932년)에 공주 갑사에서 이혼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 후 마곡사 대승사 대원암 봉선사 금용사 등에서 보림하며 불연(佛緣)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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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1935년)에 한국불교계 일본시찰단에 참여했던 용봉 스님은 21세에 불교 성극단을 조직해 일본 순회공연을 펼치는 등 불교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22세(1939년)에 박대륜 스님의 법제자가 된 용봉 스님은 혜화전문학교(現 동국대)에서 박한영 권상로 김동화 교수에서 수학했다.
24세(1941년)에는 육당 최남선 선생의 서재에 머물며 정인보, 이광수 등 석학 문호들과 교류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던 1945년, 용봉 스님은 충남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마곡사 등에서 도내 사찰 주지 및 승려대회를 통해 대전ㆍ충청지역 중등사학의 효시인 보문중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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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1946년)에 보문중학교 교장 서리를 하던 스님은 이후 34년간 교육 일선에서 인재양성에 힘쓰다 태고종 종립 동방불교대학 학장을 끝으로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 74세(1991년) 되던 해였다.
용봉 스님은 대전시 교장단 회장, 충남도교육회 회장,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등 교직단체의 지도자로도 활동했을 뿐 아니라, 충남지역 문학활동의 초석을 다지며 충남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스님은 교육을 통한 인재불사는 물론 다방면에서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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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 한국불교가 비구ㆍ대처간의 갈등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용봉 스님은 분규수습을 위한 불교재건 10인 위원, 비상종회 교화분과위원장 등에 선임돼 불교계의 화해와 융화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매주 일요일 법회를 열어 출가자의 본분 중의 하나인 교화에도 쉼이 없었다.
용봉 스님이 평생 불교와 교육, 문학에 헌신한 결과는 20여 개의 법문(강의) 테이프, 3000여 회의 설법 자료, 시 등 문학작품 300여 점, 1만 여 매의 자료 카드 등 방대한 양으로 6월 5일 봉정될 추모전집에 오롯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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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됩니다. 승단 자체도 부처님 당시의 원시불교 때에는 출가자 중심이었으나 이젠 하화중생의 대승행에 앞장서는 재가불교에 역점을 둬야 합니다.”
용봉 스님이 입적한지 18년이 지났다. 스님의 육성이 아직도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