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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라! ‘내 안의 하나님’ 과 ‘나의 참된 나’
<예수는 없다> 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과 동양철학 ’

종교적 신비주의 대중화ㆍ일상화ㆍ생할화 돼야 모두 깨쳐
<도마복음>의 ‘힘센 자를 결박하라’ 불교 무아(無我)사상과 비슷



일시: 2009년 5월 8일
장소: 서울 신사동 <불교평론> 세미나실
주최: <불교평론>
발표자: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大)
주제: 도마복음과 동양 철학



오강남 교수.

<예수는 없다>등의 저서를 통해 불교와 개신교, 개신교와 불교의 사상적 공통분모를 강조해 온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大).
최근 오 교수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긴 <도마복음>을 불교와 도교 경전 등을 인용해 해석한 <또 다른 예수>를 출간해 눈길을 끌었다.
오 교수는 서울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매월 격주로 열리는 ‘열린 논단’ 포럼에 발제자로 참석해 도마복음과 동양철학을 비교하는 강연을 펼쳤다. 기독교 신자인 오 교수는 “도마복음은 한마디로 ‘내 마음 안에 빛으로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구원이다’고 말한다”며, “이는 불교의 ‘내 안의 부처를 찾아라’와 일맥상통함은 물론 동양의 불교, 노장, 양명학과 통한다”고 주장했다.
<오강남의 도마복음 풀이>를 저술하기도 한 그는 이 강의를 통해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포럼에서 오 교수는 도마복음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풀이와 이해를 넘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동양사상과 비교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다음은 이날 강의의 요지다.



# <도마복음>의 발견은 원자폭탄과 같은 충격 줘


1945년 이집트 낙 하마디(Nag Hammadi) 지방에서 농부들이 땅을 파다가 항아리를 발견한다. 이 항아리 안에는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책이 나왔다. 하지만 농부들은 이 책의 용도를 몰라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일부 남은 문서가 떠돌다 학자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불소시개로 쓰였던 책이 금보다 수천 배는 귀한 가치를 지닌 복음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복음서가 바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가 예수의 어록을 기록한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으로 1세기경에 필사된 복음서다. 옥스퍼드大의 한 학자는 이 사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과 맞 먹는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일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도마복음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마복음은 고대이집트어인 콥트어로 쓰였다. 요한복음과 같은 시기에 필사됐고 내용도 50%정도 비슷한데, 깨달음을 강조한 점이 다르다. 이는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복음 등 기존 <공관(共觀)복음서>에서 많이 언급되는 기적ㆍ예언의 성취ㆍ재림ㆍ종말ㆍ최후 심판ㆍ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 대신 자기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동양의 노장사상, 불교철학, 양명학과 유사한 논리다. 이처럼 도마복음은 예수의 “나를 따르라, 나를 믿어라”는 표현대신 “깨우쳐라, 깨달으라”로 일관하고 있다.

세계적인 비교종교학자의 강연인 만큼 이날 포럼에는 저명한 신학ㆍ목회자들과 불교계 지식인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진행했다.



# 1600년 간 단절된 기독교 비의 드러낸 도마복음


세계종교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종교는 현교적(exotericㆍ표준적)종교와 밀교적(esotericㆍ심층적) 종교로 나뉠 수 있다. 현교는 관심이 주로 기복적인 것, 즉 잘 믿으면 복을 쌓고, 천당을 가는 등의 가르침을 이야기한 반면, 밀교는 보편적으로 ‘참 나, 진짜 나, 나의 정체성’에 대해 가르쳤다.
공관복음은 주로 하나님과 인간의 차별성을 강조한 반면 도마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동일성을 강조했다. 1~3세기에 기독교의 밀교와 현교적 가르침이 공존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위해 하나의 교리만을 채택했다. 이때 공관복음 등 복음서 27권을 제외한 도마복음과 같은 밀교적 가르침을 포함한 나머지 책들은 폐기돼 1600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된다.
불교에도 현교와 밀교가 있고, 힌두에도 <우파니샤드>와 같은 밀의적인 가르침이 있듯 기독교에도 밀의적 단계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마복음은 1600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다. 기독교가 그동안 현교적 종교로 만 내려오며 기독교내에서 신비주의적 전통이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도마복음의 발견은 ‘신은 나와 다른존재’로 여기지 않고 ‘신은 내안에 있다. 신은 곧 나다’와 같이 높은 단계의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평가를 받는다.



#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 깊숙이 들어가야

기본적으로 종교는 △문자주의 △심리주의 △영적인 것 △신비주의의 네 가지 요소를 공통으로 한다. 문자주의와 심리주의는 현교적이며 영적인 것과 신비주의는 밀교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어떠한 종교이든지 간에 현교적인 것은 문자 그대로 가르침을 뜻하고, 밀교적인 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지 않고서야 그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털어갈 수 있겠습니까?’” (도마복음서 제35절)

- 도마복음의 전체적인 기본 정신을 내면적인 변화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값진 것을 되찾아 올 수 있으려면 지금 우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힘센 자를 결박해야 한다.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 힘센 자란 결국 우리를 손아귀에 넣고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이기적인 우리의 자아(ego)와 거기에 따르는 욕심, 정욕, 무지, 자기중심주의 등일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우리의 이런 ‘이기적 자아(ego)’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나 유교의 무사(無私)라는 것도 이런 이기적 자아를 없애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복음>)라고 했다. 나의 작은 목숨, 작은 자아를 내어놓을 때 비로소 큰 목숨, 큰 자아와 하나가 돼 그것을 찾게 된다. 내 안의 의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쫓아냄, <장자>에서 말하는 ‘오상아(吾喪我:내가 나를 여읨)’하는 체험과도 그 뜻이 같다.



# 불성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신(神)적 요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도마복음서 제77절)

-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요8:58)’ 있었던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와도 뜻을 같이 한다. 이때의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초개인적인 자아’,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신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즉,
‘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 내 안의 ‘하느님’은 참된 ‘나’


한 미국인 스님은 “내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돼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스즈키 순류 선사 밑에서 선 수행을 한 리처드 베이커 주지 스님(샌프란시스코 선원)이다. 또한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종교적 신비주의의 민주화 즉, 신비주의의 대중화ㆍ일상화ㆍ생활화가 요구되야 만이 모두가 깨칠 수 있다. 원래부터 기독교에는 신비주의적인 전통이 있었고 이는 텍스트 그대로 해석하는 현교적인 기독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종교든 간에 문자 그 깊숙이 들어가면 종교라는 것이 점차 의미 없는 단계로 들어가므로 ‘나를 믿고 따르라, 나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다’는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참 의미를 새겨야 도마복음이 강조한 대로 ‘내 안의 하느님, 나의 참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종교의식이 한 단계 상승한다면 진정한 자유와 떳떳함, 늠름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자각이 성경에서 말한 자유와 사랑을 줄 것이라 믿는다.
정리=이나은 기자 | bohyung@buddhapia.com
2009-05-18 오전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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