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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들은 불교 표준 수화집의 발간으로 불법을 쉽게 접하게 됐다. 무엇보다 스님을 대머리로 표현하는 등의 잘못된 표현, 지역별 서로 다른 수형으로 사용되는 불교 수화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다. 불교계에서 장애인에 대한 포교가 전무한 상황에서 청각장애인 포교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지만, 아쉽게도 장애인 포교에 대한 관심 부족은 이웃종교에 비하면 여전히 심각하기만 하다.
장애인 불자들의 모임 ‘보리수 아래’가 월1회 여는 정기법회에는 150여 명의 회원 가운데 한 달에 6~8명의 회원만이 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부대중 대다수는 장애인 법회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과 불교방송 라디오 진행자 정목 스님 정도가 그나마 꾸준한 관심을 보이는 정도랄까? 이는 대부분의 스님이나 신도들이 장애인에 대한 접근법을 모르는 데 원인이 있다. 여전히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자로 바라보고 포교 정책은 후원이나 성금을 전달하는 방식이 전부다.
개화사상을 토대로 선교사의 복음전도와 함께 시작된 장애인 복지사업을 불교계가 벤치마킹했으나 미흡하기만 하다. 똑같은 방식의 포교에 그쳐있기 때문. 특히 불교는 인과응보설과 윤회사상 등의 영향으로 장애를 전생의 과보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적으로 장애인에 대해서는 동정의 대상 정도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는 천안(天眼)제일 아나율은 시각 장애인이었고 다문(多聞)제일 웃다라는 척추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부처님은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평가 받게 하는 미래지향적 장애인관을 제시했다. 또 경전에 나오는 장애인의 모습은 소외가 아니라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잡아놓은 물고기가 아니라 낚시법이다. 무조건식의 퍼주기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모색해야한다.
법당에 들어가는데도 수많은 계단과 턱의 장애물이 있다. 법회를 보려면 차량의 지원도 필요하고 자원봉사자들도 필요하다. 손을 잡아주고 함께 차를 나눠 타는 마음이 아쉽다.
이 세상에 어느 하나도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인연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 발전 나가는 것이 부처님 법이다. 최고의 장애인 복지와 포교의 방법을 부처님은 주셨다. 우리가 그 법을 쓰지 않으면 그것이 장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