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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가정의달 5월, 전국 사찰은 수많은 불자들로 북적인다. 성지순례를 하기 위한 참배객들부터 꽃구경을 하기 위한 등산객까지 사찰을 찾는 이는 다양하다.
이런 불자들을 위해 주요사찰들은 셔틀버스 및 관광버스를 운용하고 있다. 기도처의 염불ㆍ절 수행 열풍 뒤에는 안전히 그들을 나르는 버스기사들의 노고가 숨어 있었다. 기사들은 전국 어느 외진 곳에 위치한 성지라도 어김없이 신심을 싣고 달리고 있다. 매년 10만km를 달리는 그들의 불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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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정신지체 앓은 딸 치유기원하며 불교 접해”
“봉사하는 마음이 현재 나를 있게 해”
구룡사 전담기사 여평구 기사
구룡사 셔틀버스 기사인 여평구 거사(65)를 만난 것은 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여 거사는 이날 구룡사 일요법회에 온 불자들의 차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택시기사로서 운전불자연합회 창립멤버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여 거사가 구룡사 버스를 몰게 된 인연은 무엇일까.
여 거사가 처음 운전대를 잡게 된 것은 1973년 제대 후 법무부 재소자 호송버스를 몰면서 부터였다. 그러던 중 신혼과 예쁜 딸아이까지 낳아 미래를 설계하던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 왔다. 75년 교통사고로 인해 딸의 머리 일부분이 함몰됐기 때문이다.
여 거사 자신도 부모님이 용주사 문수암에 기도를 해 어렵게 태어난 자식이었기에 딸 아이의 사고 소식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사고 휴유증으로 정신지체를 앓게 됐다.
여 거사는 “딸아이가 자라면서 담배 등 심부름을 시키면, 집 대문을 나서기 무섭게 다시와 물어볼 정도”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이런 딸을 위해 여 거사는 다른 이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 했다. 법무부 호송버스로 매일 아침마다 대전중학교 학생 100여명을 안전 등교시킨 것이다.
이러한 선업은 그에게 또 다른 선과를 낳았다. 여 거사의 선행이 알려지며 87년 배명인 법무부 장관이 법무부 표창을 한 것이다. 부상으로 받은 택시로 그는 호송버스를 은퇴하고, 택시기사가 되어 대전 운불련 창립 당시 총무부장을 맡는 등 본격적인 신행활동에 나섰다. 100여대의 불자기사들은 시설아동 야유회와 노인효도관광 등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봉사를 전개했다.
그의 신심이 더욱 증진된 계기는 조금씩 상태가 호전된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교에 진학할 때였다.
여 거사는 “당시 정신지체로 딸아이가 전교 최하위를 도맡다시피 했다. 오죽했으면 담임교사조차도 여상 진학에 회의를 보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여상조차 못가면 사람구실을 못할 것 같아, 시험을 봐서라도 보내겠다고 했다. 당시 그 중학교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3명이 그 시험에 응시했다”고 토로했다.
시험에 앞서 여 거사는 평소 교양대학으로 다니던 대전중앙불교회관에서 매일 새벽 3시부터 6시간씩 불공을 드렸다. 기도의 영험일까, 다행이 딸은 3명 중 유일하게 시험을 통과해 합격했다.
여 거사는 이를 두고 “부처님의 가피로 가능했다. 이건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이들은 여상 간 것이 대수냐고 말할 수 있지만, 목숨을 잃을 뻔 한 아이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해 스스로 진학했다는 기쁨은 그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여 거사는 “딸이 이제는 30대 아줌마로 결혼해서 애도 낳고 잘 살고 있다”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다.
현재 여 거사는 1993년부터 서울시내 버스기사를 하며 구룡사 일요법회 등에 다닌 인연으로 2000년부터 구룡사 셔틀버스를 몰고 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천수경을 틀며 양재역에서 구룡사로 오가는 8번의 운행은 그에게 일종의 팔정도 수행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군장병이 만들 연등을 군부대까지 실어 나르는 등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갑자기 뛰어드는 오토바이도, 앞을 가로 막는 택시에도 묵묵히 핸들에 걸린 염주를 돌리는 그의 운행에는 불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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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절하다 시피 했던 아들, 고우 스님 법문 듣고 화해해”
“마음을 상대방에 맞추니 만사형통”
중앙신도회 등 불자 나르는 YES관광 허길웅 기사
Yes관광에 근무하는 허길웅 거사(67)는 1993년부터 관광버스 운전을 시작했다. 15년간 기술자로 괌, 사우디 등 한국통신의 해외지부 근무 후 돌아온 그를 반긴 것은 그동안 기다려 준 아내와 유치원 다닐 무렵 떠나 다 성장한 아들, 딸이었다.
“집에서 생활을 같이 안 하니, 마치 손님 같았지.”
매년 가족을 보기위해 한 차례씩은 한국을 찾았지만 그에게나 아내와 아이들에게나 힘든 시간이었다.
특히 사춘기에 아버지와의 정서적 교감을 갖지 못한 부자간 갈등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었다. 건축사로 일하던 아들이 IMF당시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머물며 더욱 갈등은 촉발됐다. 평소 완고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젊어 고생을 마다 하지 않은 그에게 30대 노총각이 되어, 집에서 밤새 게임하는 아들의 모습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내와 함께 아들은 식당일을 시작했지만 불편한 관계는 그대로였다.
“다툼이 끊이질 않아, 퇴근 후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들 편을 드는 아내와 각방을 쓸 정도로 나빠졌다. 오죽했으면 집에 키우던 개가 발소리를 먼저 듣고 짖으면 방에 들어가 잘 정도였다”고 허 거사는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허 거사의 가정사는 순례 운행 후 우연히 동참해 들은 고우 스님 법문으로 달라졌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피곤함에 취침하는 여느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봉화 금봉암에 도착해 쉬려던 허 거사는 유난히 법문을 듣고 싶어졌다.
법회를 찾은 그에게 고우 스님은 “사람은 갈 길이 다르고, 자기 행을 닦는 인연 따라 과보가 온다”며 “누가 누구를 위해 빌어준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 법문했다.
이후 허 거사는 아들에 대한 마음이 일종의 욕심임을 깨닫고 상대방 입장에서 마음을 내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허 거사의 인생과 생활에 아들이 맞추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가족의 마음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하자 모든 일이 화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족도 자신에게 맞추기 시작했다.
허 거사는 “우선 평소 하지 않던 설거지 등 집안일부터 나서서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도 서로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대화로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신기하게 욕심을 버리니, 서산 땅에 4차선 도로도 나는 등 오히려 복이 들어오더라”고 말했다.
허 거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2007년 서울대에 시신기증 서약을 하고, 대신 장례비를 불우이웃을 돕는데 써달라고 선언했다. 자그마한 서산 땅도 자녀들에게 사회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허 거사의 운전습관도 변했다. 빠르게 가기 보다, 주변을 둘러보며 법문 하나를 함께 듣는 여유가 생겼다. 불자들과 순례 시 주로 듣는 테이프는 역시 고우 스님의 법문 녹음집이다.
원래의 성실함에 더해 운전에 여유가 더해지자 총무원, 중앙신도회와 각 사찰에서 요청하는 일 또한 밀려들기 시작했다.
현재 허 씨는 관광버스 기사도 하며, 종로구청 앞 아들의 ‘강원식당’과 조계종 총무원 앞에 있는 아내의 ‘만화식당’ 일도 돕고 있다. 내년이면 40을 앞둔 아들도 올 해 장가를 갈 계획이다.
“버스 노래방 기기를 이용해 찬불가와 사찰 안내, 주변 볼거리가 번호만 누르면 나오는 방송교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허 거사. 그의 버스에는 여유가 가득하다. 011-227-4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