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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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다송’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키우는 노래
원학 스님, 조계종 총무원서 종무원 대상 특강


<전문>


초의 선사(1786~1866)는 근세 민족사에서 선리(禪理)와 경학(經學)에 밝은 수행자로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 선지식이다.

<동다송(東茶頌)>은 초의 선사가 정조 대왕의 딸인 숙선 옹주(宿善翁主)와 결혼한 홍현주(洪顯周)의 요청으로 쓴 송구로 어느 끽명다인(喫茗茶人)들의 시문보다 뛰어난 다송(茶頌)이다. 차에 식견이 높았던 초의는 자신의 저술인 <다신전(茶神傳)>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자생중인 소엽종자인 작설차(雀舌茶) 동다(東茶)에 관한 찬송을 붙였다. 7언절구 17송으로 총 500여 자 자구(字句)로 쓰인 <동다송>은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차 생활에서 우러난 진솔한 체험을 담고 있다.

바쁜 종무원들에게 <동다송>의 차 한 잔하는 삶의 여유와 지혜를 선사하고자 조계종 총무부장 원학 스님은 3월 30일~ 4월 13일 중앙종무기관 종무원을 대상으로 <동다송>을 강의했다. 평소 동양화를 그리며 남다른 예술적 감각을 소유한 원학 스님의 선기(禪機) 가득한 강의를 들어보자.

3차에 걸쳐 진행 중인 스님의 강의를 2회로 나눠 게재한다.

주제: <東茶頌(동다송)>
일시: 3월 30일~ 4월 13일 매주 월요일
장소: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인간적인 삶=자연의 삶


돈 되는 이야기나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면 좋을 텐데 200년 전 이야기로 고리타분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 강의를 처음에는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200년 전 이야기라 삶 속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삶에 여유를 주는 배움의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마음 정(情)이 있다는 말이죠. 또한 정을 가진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의 선사 이야기를 배우는 이 자리는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자심(慈心)과 비심(悲心), 곧 정(情)입니다. <동다송(東茶頌)> 내용을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배우고 익히며 깊이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소리 같이, 부담 없이 듣는 염불 같이, 자연을 가장 아끼고 살아하는 사람들의 고시를 감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자연인 초의선사의 시어로 본 진향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속 떠내려가는 구름을 밟고 창문은 소나무위 둥근달을 머금었네. (履雜潤底雲 窓含上松月)


졸졸 흐르는 물 속 정경을 관조하는 자세와 창문이 소나무 위의 달을 머금었다는 표현에는 삼라만상을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존중하는 초의의 자연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초의의 시어를 가까이 접하다 보면 수행자로서 평상시 자연에 대한 직관력과 관찰력이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시정이 느껴집니다.

시공을 초월해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달과 구름의 조경을 어느 한 순간 포착해 이렇게 묘사한 것은 초의의 시각과 직관력, 관찰력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초의의 직관력은 일상 속에서 저절로 무르익어가는 삶의 향기 같은 다도(茶道)생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의는 스스로를 ‘부지런히 만행을 닦고 번뇌를 쉬어 없앤다’는 사문(沙門), ‘안개를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찬하자(餐霞子)라 불렀습니다. 항시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자연의 정취를 다도 속에 누렸던 초의는 화려한 명예, 부귀, 권력의 윤색함과는 거리가 먼 탈속한 삶,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초의의 삶을 통해서 배울 것은 지식이나 학문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자연입니다. 우리가 평소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연을 사랑할 수 없고 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법구경>에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정은 상대적이라 애정을 가진 자는 반드시 질투를 낳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자연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인공향수를 뿌리고 성형을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돈 들여 가꾸려 말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예뻐지고 자연스럽게 향이 납니다. 초의의 생애와 <동다송>을 통해 차에 대한 덕목을 헤아려 보세요. 바쁜 생활 속에서 벗어나 탈속한 삶의 자세를 배우고 다도의 향기를 생활의 다반사로 자리매김 시켜보세요. 여러분들의 삶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선리(禪理)와 경학(經學)에 밝은 수행자 초의


근세 민족사에서 초의는 선리(禪理)와 경학(經學)에 밝은 수행자일 뿐 아니라 인간중심의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너무나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 선사입니다.

초의는 15세에 남평 운흥사로 출가했습니다.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이후 해남 대흥사 완호(玩虎) 스님에게 구족계와 법맥을 이어 받아 초의라는 법호를 쓰며 출가수행자의 기본 관문을 닦았습니다. 그가 초의라는 이름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24세 되던 해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만나서 시문과 유학에 눈뜨면서부터입니다. 초의는 다산을 만나 인생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해남은 지리적으로 변방에 속했습니다. 지리적 한계 속에서 식견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또 배불(排佛)시대에 유학자들과 교류한 것은 초의에겐 행운이었습니다.

1815년, 초의가 30세 되던 해에는 동년배로서 평생을 도반으로 정담을 나누고 살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김명희, 김상희 형제를 비롯해 다산의 아들인 학연, 학유 형제를 가까이 사귀면서 인간관계의 폭을 넓혔습니다. 여기에 자하, 홍석주, 신위 등 문사들과의 교류를 더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갖게 됐습니다.

초의는 포교 전략사이기도 했습니다. 초의는 승려와 유생들의 교류가 어려웠던 시절, 시문을 통해 배불숭유자들과 교류하면서 선문(禪門)에 대한 불신을 무너뜨렸습니다.

승려의 신분이라 유배자의 적소 출입이 자유롭던 초의는 추사 등과 친분을 쉽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에게는 정성들여 만든 작설차를 제자 소치(小痴)를 통해 보내기도 했습니다. 적거지를 찾아가 외로운 추사와 함께 서화, 다도, 경문, 선경(禪境)을 토론하며 25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진정한 도반이 됐습니다.


#초의의 삶


초의는 명사들과의 교류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자 1824년 대흥사 동쪽 골짜기에 초암을 마련해 일지암(一枝菴)을 짓고는 잠시 떠났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초의가 71세 되던 해(1856년) 추사가 과천에서 생을 마치자 완당금공(阮堂金公) 제문을 지어 보냈습니다. 이후 초의는 1866년(고종3) 세수 81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열반할 때까지 일지암에서 만년을 보냈습니다.

‘안개는 옛 인연을 잊어버리기 어려워라/ 물병 발우그릇 살림살이 집이래야 서까래 몇 개 걸쳤네/연못을 만들어 허공 달이 잠겨 오게 하고/ 간대를 이어서 백운샘물 끌어 왔다네’

초의의 삶은 이렇게 소박했습니다. 자신을 안개에 비유해 안개가 청산을 찾아와 산허리를 쓰다듬고 슬며시 사라지는 듯해도 청산이 있는 한 안개는 반드시 찾아오듯이 자신도 일지암을 지어놓고 떠났다가 다시 오게 됨을 청산과 안개에 비유했습니다.

일지암의 살림살이는 물병, 발우그릇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초의는 연못을 만들어 물을 채우고 밤이면 허공의 달이 못 속에 잠겨 있도록 해 정취를 즐겼습니다.

게다가 그 달이 언제나 못 속에 잠겨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높은 곳 백운의 샘물을 간대로 끌어와 못 물이 마르지 않도록 했다는 것은 거래가 분명한 자연의 빈객을 맞이하고자 노력한 초의의 안목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초의의 삶은 요즘 출가자의 삶과 너무 다릅니다. 요즘 출가자들은 어떻습니까? 화려하면서도 출가자의 본분에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은 호되게 비판받아야 합니다. 출가는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애욕의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반면에 초의와 같이 자연의 정경을 즐기며 동화돼 사는 것은 끊기도 어렵지만, 자연관의 인연은 끊어서는 안 됩니다.

달은 사람, 빗물, 지위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 안아줍니다. 언제든지 내 가슴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슴에 무엇을 담고 삽니까? 무엇을 담고자 합니까? 마음대로 팍팍 쓸 수 있는 돈이요? 돈은 나를 절대 넉넉하고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유명기업의 회장아들도 이혼을 하는 세상입니다. 남부럽지 않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이혼하겠습니까? 1000생의 인연으로 만난 부부라는데 왜 그럴까요? 이것은 자연에 대한 마음, 정, 애경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달이 일지암 앞 연못에 담겨있 듯 여러분의 가슴에도 달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삶의 공간을 자연과 접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은 수많은 재산을 모으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초의 선사를 보며 진정한 행복을 되짚어봅시다. (계속)
글=이상언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un82@buddhapia.com
2009-04-16 오후 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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