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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譯經)은 언어(공간)와 세대(시간)를 동시에 넘나드는 고된 작업[逆境]이다.
단순히 글을 옮기는 작업이 아닌 글 속의 뜻까지도 오롯이 전하는 어려운 작업인데다 인력과 시간 등에 애로사항이 많아 ‘제대로’ 역경하기란 희유한 일이다.
역경이 전문인력도 구하기 어렵고 고비용 사업인 까닭에 기관조차도 전통 방법을 살리기 힘든 현실이다.
역경보살로 칭송받으며 평생 역경의 길을 걸어온 월운 스님(봉선사 조실)이 전통 역경 방식의 하나인 증의(證義)를 재현해 눈길을 끈다.
증의는 원전과 번역문을 비교해 번역한 뜻이 올바른가를 판별하는 작업.
<한글대장경>을 비롯한 근래의 역경작업에 증의가 있었지만 교정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월운 스님은 2009년 3월 28일 전강제자들과 남양주 봉선사 운하당에서 <무상계강화(無常戒講話> 독회를 열었다. 2008년 12월 동국역경원 원장직에서 물러난 지 100여 일만의 일이다.
역경원 원장직은 놓았지만, 역경보살의 본분사만은 놓지 않았던 스님은 그동안 <무상계강화> 저술에 매진해 왔다.
<무상계>는 338자로 구성된 간이경전으로, 원효 스님이 만주 벌판에서 머리 없는 무두귀(無頭鬼)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짧고 간결한 내용으로 시다림 등 의례와 신행에 널리 유통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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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운하당에는 정원 준수 진원 시원 법등 스님 등 11명의 전강제자와 능엄학림 학인스님들이 참석했다. 참석하지 못한 다수의 전강제자들은 사전에 원고를 검토하고 이메일 등으로 월운 스님에게 의견을 제기해 뒀다.
월운 스님의 “<무상계>가 짧지만 알찬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정경(正經)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공덕경류(功德經類)에 섞여 재장(齋場)이나 굿판으로 내몰린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그동안 역경사업을 진행하면서 1차 번역한 경전을 꼼꼼이 점검하는 절차가 생략돼 온 것에 늘 마음에 걸렸다. 죽기 전 전통 역경 방식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 마련한 자리”라고 말했다.
월운 스님은 <무상계>를 해제와 독송용무상계, 과도와 과명 풀이 등을 실었다.
본문은 △무상계의 공덕을 미리 찬양하심과 △무상계 닦는 법을 직접 보이심 △닦아 얻어진 공덕을 찬탄하심의 3대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3장으로 구분한 뒤 각각에 강화를 더했다.
서분과 정종분 유통분으로 삼분(三分)이 갖춰진 정경과 비교해 정종분만 있는 <무상계>는 <반야심경> 등과 함께 가죽과 살은 없어지고 뼈만 남은 동물과 같아 골경(骨經)이라 불린다.
월운 스님은 골경인 <무상계>를 스님만의 안목으로 분석해 과도를 그렸다.
불법의 정수가 골경에 녹아 있듯, 평생 경전과 씨름해 온 월운 스님의 학식은 해제부터 13장 강화까지 구절구절마다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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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의 어원에 대한 기원을 비롯해 <금강경> <법화경> <삼국유사> 등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넘나드는 박학한 이야기도 있고, 12인연의 상의상관성을 홈통의 대롱에 물이 들고 남으로 설명한 대중설법 같은 비유도 있다. 노장이 후학에게 전하는 가르침은 각주 끝까지 빠짐없이 기록됐다.
“누가 했는지 고려하지 말고, 같은 배 탔다는 심정으로 잘 되도 못 되도 하나라는 마음으로 지적을 아끼지 말라.”
월운 스님의 당부가 끝나자 학인스님이 한 구절, 한 구절 <무상계강화>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120장 분량의 원고 중 각주를 제외한 본문이 읽혀지는 동안 문제가 있는 부분에는 거침없이 토론이 이어졌다.
“용어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한자가 틀렸습니다.” “앞과 뒤의 한자가 혼용돼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세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등 마라톤 토론이 벌어진 5시간 동안 스승과 제자의 상(相)은 간 곳 없다. 모두가 역경사일 뿐이었다.
이날 증의에 참여한 스님들은 스승 월운 스님에게 점검도 받았다. “경전을 보는 사람이 고전이 약하다”는 지적부터 “00 스님 예불 거르지 말고 나와”라는 말까지.
일독(一讀)이 끝났다. 월운 스님은 “무상계를 제방에 보급하고 싶었지만 혼자는 자신의 벽을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생각할 것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고전을 홀로 번역하는 풍토를 그치고자 자리를 마련했었다”라며 “섣부르게 경전을 번역하겠다고 접근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역경을 제대로 하려면 고전을 두루 살필 안목과 소양은 물론 자기 수행 등이 겸비돼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무상계강화>는 수차례 증의와 윤문 등을 더 거친 후 출간될 예정이다.
동국역경원 박종린 위원은 “증의는 번역이 부처님 말씀에 합당한가를 증명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강주급 이상의 스님은 돼야 제대로 증의를 할 수 있는데, 이런 전문가를 구하기 힘든 현실에서 봉선사에서 재현된 증의는 역경의 바른 본보기를 보인 행사”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재현된 전통역경 방식은 동국역경원이 설립초기 번역과 증의, 윤문에 대해 각 위원회를 두고 운영한 적은 있으나 인력 및 시간 부족, 경비절감 차원에서 지속돼지 못했다.
최근에는 조계종 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위원장 지관)가 전통 역경 방식을 도입해 5월 회향될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에 번역자간 소통 중심의 다자간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