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달라진 햇살, 폭신폭신해진 돌계단, 시끄러워진 산새들. 겨울 한 철 살고 간 수좌의 뒷모습은 잊혀져가고, 기다린 소식처럼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온다. 공양간 고양이는 돌담 아지랑이 속에서 어슬렁거리고, 꽁지 검은 산새는 객쩍게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앉는다. 봄이다.
법당마다 목탁소리가 울린다. 사시마지(巳時麻旨)를 든 행자 셋이 각자 법당 앞에 선다. 부처님과 가장 가깝게 서는 시간, 마지 든 두 손 위에서 힘들었던 시간들이 멈춰서고 마주친 부처님의 두 눈에서는 부처님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다가온다. 삼층석탑을 지날 때 들었던 풍경소리가 법당 문 앞에 와 있다.
염화실 돌담 위에는 흰 매화가 활짝 피었다. 매화 꽃잎 사이로 마침 무비 스님이 언뜻언뜻 보인다. 이태 전 염화실 마당에서 무비 스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스님은 앞뜰의 커다란 소나무를 가리키며 “나무가 저렇게 큰 데도 매년 자랍니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나무는 말없이 일러줍니다.”
매화는 시방세계(十方世界) 꽃피는 자리를 만들고, 그 옛날 범어사에서 머리 깎았던 스님은 이제 염화실 마당을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