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승가의 청정을 강조한 성철 스님이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고 말했던 것은 오욕(五欲) 가운데 명예욕이 가장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 당한다”면서 “명예를 경멸해야 할 철학자들마저도 저술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ㆍ세간을 막론하고 명예를 쫓는 이들이 넘쳐나는 요즘, 출가자로, 불교학자로 세수 고희(古稀)를 앞둔 호진 스님(前 동국대 교수)이 승가교육기관의 수장격인 중앙승가대 총장직을 하심과 무소유 정신으로 고사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호진 스님(69)은 1964년 출가해, 1981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초기불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까지 중앙승가대와 동국대를 역임했던 스님은 중앙승가대 안암학사 건립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호진 스님은 제대로 된 <부처님의 생애>를 저술하겠다며 2008년 인도를 찾기 전, 자신이 유고하면 책 등을 중앙승가대에 기증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에 앞서 2002년 동국대 교수직 퇴임 때도 “후학을 위해 길을 열어주겠다”며 물러났을 뿐 아니라, 퇴직금 6000여 만원을 모두 중앙승가대에 기부하는 등 중앙승가대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학승이다.
이런 까닭에 종단에서는 종범 스님을 대신할 차기 총장에 호진 스님만한 인물이 없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됐었다.
학교법인 승가학원 이사회(이사장 지관)는 2월 1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제81차 이사회를 열고 호진 스님을 제5대 중앙승가대 총장에 추대했다.
이날 이사들은 장시간의 격론 끝에 만장일치로 호진 스님의 총장 선임을 결의했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스님의 선임을 머뭇거렸던 것은 지관 스님을 비롯해 정념 스님(중앙승가대 총동문회장) 등의 “(이사회가 결정해도) 호진 스님의 총장직 수락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정념 스님은 “학덕과 인망을 두루 갖춘 총장 후보를 찾다보니 호진 스님을 추대하게 됐다. 하지만 사전에 스님의 승낙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관 스님도 2월 12일자로 발송된 호진 스님의 서신을 꺼내 보이며, “호진 스님이 ‘능력이 부족하고 중책을 맡기에 나이가 많으니 총장직을 사양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관 스님은 “‘사방에서 적임자라 하니 스님이 희생해 달라고도 직접 통화도 해봤고, 호진 스님의 은사인 법인 스님에게까지 압력(?)을 넣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특히 도반인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장)도 호진 스님을 설득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고 소개했다.
교계에서 호진 스님과 지안 스님의 절친한 도반 사이는 유명하다, 호진 스님이 인도에 머물던 2008년 지안 스님과 주고 받은 서신이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청화 스님(교육원장)의 “호진 스님이 사적으로 요청했을 때는 고사할 수 있지만 이사회에서 결정해 요청한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발언에 이사들은 마침내 추대를 결의하고, 고사 중인 호진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종하, 청화, 정념 스님을 교섭위원으로 선출했다.
이사회 직후 중앙승가대 구성원들과 경주 기림사를 찾아 호진 스님을 면담한 월우 스님(중앙승가대 총무처장)은 “이사회의 뜻을 전하며 ‘중앙승가대의 학풍을 바로잡아 달라’며 재차 강조한 결과, 금명간 교섭위원 스님들이 호진 스님을 만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법이 없는 사람이 어찌 조실을 맡겠냐”며 봉암사 조실을 사양했던 적명 스님이나 “능력도 없고 나이도 많으니 총장직을 수락할 수 없다”는 호진 스님. 두 스님의 겸양은 탐욕으로 고통을 자초하는 대중들에게 가뭄의 단비요, 무명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