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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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 드러진 기와곡선 ‘정신과 손’의 합작품
이근복(중요무형문화재 번와장 제121호)



법주사 대웅전 돈화문 등 200여 건물에 기와 올려
“기와 잘 이어야 건물의 멋 수명 제대로 유지”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을 말한다. 이근복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번와장이 됐다. 일반인들에게 조금은 생소한 번와장인 이근복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날은 참으로 추웠다. 두툼한 털옷을 입었건만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은 외투 속을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근복 선생은 전수 교육장에서 기와 잇는 실습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근복 선생(중요무형문화재 번와장 제121호)


작업장 옆에 마련한 기와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궁궐을 수리하면서 버려진 기와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근복 선생은 덕수궁 대한문, 경복궁 수정전, 창덕궁 돈화문, 서울 종묘(정전) 등 수십 차례나 궁전의 수리와 복원작업에 참여했다. 그때 버려지는 기와 일부를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전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기와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교육장이기도 하다.

수키와, 암키와, 수막새, 암막새를 비롯하여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벽사의 상징인 귀면기와, 용마루의 양쪽 끝에 설치되는 치미(?尾) 등 궁궐을 축조하는데 사용되었던 다양한 기와들을 볼 수 있었다. 궁전이나 관아의 큰 건물에만 사용되었다는 잡상(雜像)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잡상은 내림마루나 귀마루 위에 한 줄로 앉히는데 신선, 법승, 기인, 괴수, 저팔계 등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이근복 선생이 번와장의 길을 걷게 된 인연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건축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혼자서 목수일 부터해서 기와 잇는 작업과 미장 까지도 거뜬히 해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등너머로 집짓는 일을 보아왔었고, 성장하고서는 아버지 밑에서 집짓는 일을 배웠다.

“아버지로부터 집을 짓는데 필요한 여러 작업을 골고루 배웠는데, 기와를 잇는 작업은 참으로 매력적이었어요. 기와만 잘 이으면 비가 새지 않기 때문에 목조건물은 썩을 염려가 없으며, 썩지 않는다면 천년은 거뜬히 간다는 것이 너무 신기로웠지요.”

콘크리트 집도 아니고 나무로 지은 집이 천년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대단해 보여 기와 잇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건축에 관한 잡다한 일들을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번와 작업을 배운 것은 1978년부터이다. 서울에서 고(故)기선길씨를 비롯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배웠다.

이근복 선생은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은 분이다. 그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흠뻑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스승님은 자신의 기술을 온전히 전수해 주지 않았다. 공사장에서 일을 할 때면 남보다 빨리 점심을 먹고는 작업 중인 지붕으로 올라갔다. 작업하다가 둔 일을 혼자서 이리저리 궁리해가며 실습 삼아 해보았다. 그렇게 해보고 나서는 행여 스승이 알까 싶어 작업한 것을 다시 뜯고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 기와 잇는 공법을 터득함과 동시에 문제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고쳐나갔다. 이근복 선생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번와 기술을 전승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대에 맞게 잘 활용하고 있기에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때는 일거리가 없어 생계를 잇기 위해 잠시 포장마차를 한 적도 있었으며, 힘든 작업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적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전통문화를 전수해나가는 이 일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전통 번와 기법의 보존을 위하여 사재(私財)로 전수교육장을 따로 마련하여 후학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데 여념이 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전수해 주자는 것이 이근복 선생의 교육철학이다.

사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근복 선생의 손을 거쳐 간 건물은 200여 채가 넘는다. 경복궁 수정전, 창덕궁 돈화문, 안동 봉정사 극락전, 보은 법주사 대웅전, 프랑스 고암 이응로 화백 자택 등을 보수공사 했다. 그리고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했으며, 진천 보탑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을 신축하였다. 1997년에 서울 숭례문을 보수했는데, 2008년 화재로 전소되어 버린 것이 두고두고 가슴 아프단다.

“저는 후학들에게 문화재가 소중하다는 정신교육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와를 잘못 이으면 문화재가 훼손될 가망성이 많기에 정신교육부터 시켜야지요. 그래서 문하생들에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날림공사를 한다면 국가도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지만, 자신이 작업한 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니 개인으로 봐서도 명예가 실추되는 등 손해가 크니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당부한단다.

우리 지붕의 용마루나 처마 곡선은 세계적이다. 그 아름다운 곡선은 오랜 숙련과 기술이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지붕은 서까래 걸고 개판 덮으면서 목수의 손을 떠나 번와공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지붕마루는 집의 윤곽선을 이룬다. 집의 모습을 좌우하는 한 부분이 되며 멀리서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붕마루는 평면적으로는 직선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곡선이다. 지붕마루는 목수가 어느 정도 마루곡선을 결정지었다 해도 그 곡률(曲律)은 번와공의 솜씨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단다. 그러니 기와를 이는 작업 또한 목수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름철 뙤약볕에 달았던 기와가 갑자기 소나기가 와도 터지지 않고, 겨울 추위에도 동파되지 않는 좋은 기와가 첫 번째 조건이며, 지붕이 오래 가느냐 아니냐는 느리개(통나무를 반쪽으로 타갠 것)와 적심(느리개 위로 통나무를 차곡차곡 채우는데, 그런 통나무를 일컫는다)이 좌우한다. 번와공은 적심을 재고 그 사이에 진흙을 가져다 붓고는 그 흙을 밟으면서 기와 잇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데 보통 힘 드는 것이 아니란다. 발은 자꾸 미끄러지지 허리는 아프지, 땀은 눈으로 코로 들어가고...... 정말로 기와를 잇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하니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요즈음 기와는 유리알처럼 너무 매끄러워 작업하기가 더욱 힘들다고 했다.

재래기와는 태토에 약간의 모래를 섞어서 만들었으며, 두꺼비 가마에서 나무로 불을 태워 구웠기에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끼가 끼고 더욱 멋스러워지는데, 현대 기와는 너무 번쩍거리고 세월의 때라 할 수 있는 이끼가 자라지 않기에 옛날처럼 멋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지붕 잇는 것에 대한 작업을 직접 듣고 보고 나니 손수 집 한 채를 지은 것처럼 뿌듯하다. 사라져가는 전통 번와 기술을 전승하는데 거의 반평생을 바쳐 온 이근복 선생이 계신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기만 하다.

글/사진=문윤정(수필가 본지논설위원) |
2009-02-16 오전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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