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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그렸더니 하늘의 본성이 드러났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일세/ 만약 누군가 억지로 (그림을) 요구한다면, 마땅히 유마 거사의 말 없는 대답으로 거절하리라.’
완당 거사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걸작 난초그림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 적힌 글이다. 완당은 이 글에서 서도(書道)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대승불교의 대표적 각자(覺者)로서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능가하는 유마 거사에 비유하고 있다. 문수보살이 불법의 진리를 묻는 질문에 ‘침묵의 법문(良久)’으로써 대답했다는 유마의 불이(不二)법문을 나름 체득했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인 것이다.
이처럼 서도가 극치에 이르면 ‘그림이 곧 완당이요 완당이 곧 그림’인 불이(不二)의 경계에 들게 된다. ‘서화의 이치가 곧 불교의 선(禪)과 통한다’고 했던 완당은 서선일여(書禪一如)의 경지를 마침내 일궈냈고, 그 성취에 스스로 놀라워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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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의 유마’라 불릴 만큼 선에 대한 안목이 높았던 완당 거사, 다성(茶聖) 초의 선사와 교분을 나누고 조선후기 사상계와 예술계를 풍미한 추사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문화행사가 참여불교재가연대와 봉은사에서 잇따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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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불교재가연대는 2월의 포럼주제로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정하고 유홍준 前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을 초청, 2월 3일 우리함께빌딩 선우법당에서 포럼을 개최했다.
유홍준 교수는 조선후기 문화를 일신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초의 선사와 막역한 관계로 지내고 말년에는 봉은사에 기거하며 선지식 대접을 받았던 완당과 불교와의 인연도 함께 소개했다. 유 교수는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다”면서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드는 엄청난 노력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한 완당이야말로 진정 입고출신(入古出新: 옛 것을 소화해 새 것을 창조함)을 감당할 수 있는 당대 동양 최고의 서예가였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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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울 봉은사는 2월 4일 보우당에서 소설가 한승원씨를 초청, 완당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추사>의 낭독회를 개최했다. 소설 <추사>는 한승원씨가 추사의 발걸음을 뒤쫓고 그의 삶과 예술, 구도행을 통해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장편소설이다.
한승원씨는 “추사는 50대 후반부터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끊임없이 욕망을 버리며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일에만 전념해 마침내 ‘글씨가 시이고, 시가 그림’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제주도에서 완성된 문인화의 최고봉 ‘세한도(歲寒圖)’에 그려진 늙은 소나무 아래 집 한 채에 대해 ‘그 집은 마음을 하얗게 비운 유마 거사처럼 사는 한 외로운(마음이 空寂한) 사람의 집’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한 씨는 “추사에게 있어 시 짓고 글씨 쓰고 난초 치는 일은 몸과 마음에 얽혀 있는 탐욕과 오만과 조급성을 모두 털어버리고 가을 호수처럼 맑은 선정에 드는 일이었다”며 완당의 삶 자체가 구도의 여정이었음을 암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