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0 (음)
> 종합 > 사람들 > 인터뷰
오직 행할뿐…
[도반의 향기] 정숙녀(금정선원장)


금정선원 정숙녀 원장.


겨울이라 하지만 부산의 바람 속에는 차가움 보다는 훈훈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장전동에 위치한 금정선원은 재가불자들의 수행도량으로 부산 불교의 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금정선원은 정숙녀씨가 원력을 세워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이루어 낸 공간이다. 정숙녀라는 이름보다는 대명화 보살로 더 알려진 그녀는 한 눈에 걸출한 여장부로 느껴졌다.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인 금정선원은 법당ㆍ선방ㆍ양로원ㆍ공양간ㆍ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심의 여느 사찰과 다름없다. 금정선원을 개원하고 나서는 바로 범어사에 명예 등록을 했다.

신도회 조직이 없어도 금정선원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철저하게 40여 명이 입선과 방선을 지키며 정진하고 있다. 2층 법당과 3층 선원에서는 매일 오전 10시 30분이 되면 죽비 삼성이 울려 퍼진다. 범어사 대정큰스님께서 화두참선을 지도해주시고 있으며, 대명화 보살은 금정선원의 책임지도와 안내를 맡고 있다. 초심자들을 위해 사찰 예절과 신행생활을 지도하고 있으며, 다도반을 개설하여 선차禪茶 수행도 병행하고 있다. 금정선원에서는 초심자부터 여든이 넘은 베테랑 불자까지 다양한 불자들이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대명화 보살은 “날마다 병원을 다니던 할머니 한 분이 하루 4시간씩 참선을 하고부터는 병원을 가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면서 참선수행의 무한한 에너지는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대명화 보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학창시절부터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가 없는 불우한 친구들에게 학비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하여 그들의 벗이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저보고 부잣집 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으니 원도 한도 없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내 가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과 같이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범어사 새벽예불에 참여했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새벽예불을 모시면서 날마다 5000배씩 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그 무엇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수십 년 간 토굴수행을 이어온 대정 스님이 범어사 상당법문에서 ‘도(道)’라고 이르는 한 마디에 대명화 보살은 알 수 없는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그 후 대정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체계적으로 화두 참선을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만 알고 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정 스님의 가르침을 보다 많은 불자들에게 전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정진하겠다고 발원했습니다. 나와 더불어 이웃이 행복해야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녀의 발원은 결실을 맺어 16년 전 부산 두실에 대명선원을 개원하였고, 참된 신앙에 목말라있던 재가불자들에게 새로운 수행방향을 제시했다.

“화두 참선이 처음에는 어렵고 잘 안되나 굳은 의지로 수행정진을 계속하다보면 번뇌망상이 차츰 사라져요. 화두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활구(活句)이지요. 도는 우리의 현실을 벗어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오고감 그대로 도가 됩니다. 성불은 이미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으니 노력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대명화 보살은 선원을 열기 전부터도 ‘소년ㆍ소녀 가장 돕기’ 등 불우한 이웃을 보면 내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등 무주상보시를 끊임없이 행하였다. 대명선원을 여는 것과 동시에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사업실패나 가정불화 등으로 정신적ㆍ물질적 고통을 겪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도와주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할 때까지 선원에서 무료 숙식하게 하고 자녀들의 등록금까지 지원하였는데 그 수가 적지 않다.

대명화 보살은 하루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저기서 대명화 보살의 보시행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인생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 불교에 입문하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녀는 이런 저런 사연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정진할 시간이 충분치 못하기에 때로는 새벽 서너 시까지 화두를 참구하기도 한다. 그녀는 보시행도 열심이지만 자신의 수행 정진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다.

대명선원을 개원할 때 12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는데 그 수가 점점 불어나 6, 70명이 되었다. 2004년에 대명화 보살은 사재를 털어 금정선원을 열었으며, 무료급식소 또한 크게 열었다. 하루에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백여 명에 이른다. 오갈 데 없는 노인 15분을 금정선원 1층 양로원에 모시고 있다. 가정의 아픔을 안고 선원으로 온 어르신들 중에는 선원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한 분도 여럿 있다. 대명화 보살은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직접 장례식과 49재를 지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한때 노숙자였던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위하여 선원 부근에 따로 집을 마련하여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대명화 보살이 지극정성으로 수발하고 있는 노인들 중에는 고혈압, 당뇨, 허리디스크, 중풍, 알콜중독 등 여러 가지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다. 이들을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도 대명화 보살의 몫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대명화 보살의 지도를 받아 기도와 참선 수행을 함으로써 완쾌되거나, 완쾌에 가깝도록 좋아져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분들도 제법 된단다. 약사여래보살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들 중에는 선(禪)의 참맛을 누리는 사람도 있어요. 참선수행을 하면 마음의 안락을 얻을 수 있으니 좋고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으니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면서 저는 적극 권하고 있습니다.”

자식들도 내다 버린 노인들 수발하랴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했더니 “이 일이 힘들고 더럽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어요. 이 일을 한지 십년도 훨씬 넘었지만, 노인들을 대하면 전생에 내 부모들처럼 느껴져 똥오줌이 더럽지도 않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답한다.

대명화 보살은 자비를 베풀되 자비를 생각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행에 대해 일체의 상 없이 ‘오직 행할 뿐’이다. 대명화 보살은 화두참선을 통하여 보리를 구하는가 하면, 전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니 삶 그대로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문윤정 논설위원 |
2009-02-02 오전 9:28: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4.1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