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버금가는 국보급 금제사리구가 출토돼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는 백제 사리구로는 충남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2007년 10월 출토)가 유일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 이하 연구소)는 1월 19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설명회를 열고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중 발견한 사리장엄물을 공개했다.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 등 5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은 주로 석탑 1층 심주 상면 중앙 사리공에서 14일 발견됐다.
발견 당시 500여 점의 유물들은 사리공 밑바닥에 깔린 녹색 유리판 위에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 ||||
작은 병에 보주형 뚜껑이 덮힌 금제사리호(높이 13㎝, 어깨 폭 7.7㎝)는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금제사리호를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금제사리봉안기(가로 15.5㎝, 세로 10.5㎝)는 주칠로 글씨가 선명히 드러나 있다. 김상현 교수(동국대) 해석 결과,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익산 미륵사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었다.
학계 전문가들은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이 정확히 밝혀져 있다”면서 “문헌사 연구의 부족함을 보완할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書體)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라고 말했다.
| ||||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로 출토됐다. 특히 정교하고 세련된 가공수법은 백제금속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김봉건 소장은 “이번 사리장엄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이번 조사는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판단된다”며 “백제문화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연구소는 수습된 유물에 대해 보존처리 후 심층조사를 거쳐 그 결과를 관심 있는 연구자와 일반인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다음은 김상현 교수가 풀이한 금제사리봉안기 해석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遶迊,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乇(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