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겨울에도 눈 한번 내리지 않는 따뜻한 남쪽도시 부산,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운 찬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동장군의 매서운 기세에 놀란 온몸 가득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비단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을 가리킨다. 부산지방경찰청 본관 1층 경승실. 오늘 이곳에서 ‘대단한 사나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경승실의 문이 열렸다. 말로만 듣던 조폭잡는 30년 경력의 형사 고행섭 경감은 들어오자마자 가볍게 인사만 건넨 후 묵묵히 좌복을 깔고 불전을 향해 예를 갖췄다. 삼배를 마친 후 그제야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넨다. 호랑이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바위처럼 뜨겁고 단단하다. 아, 진짜 형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관공서 내에 경승실이 생긴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불교수도’ 부산의 지방경찰청이며, 이를 계획하고 부처님부터 상단, 후불탱화, 바닥 다다미까지 직접 설계한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 고행섭 경감이다. 그는 2002년 ‘부산경찰불자회’를 창립, 2004년에는 부산지방경찰청에 경승실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20평의 추운 방안에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며 “바쁜 대민 업무 와중에 외려 불심을 깊게 하고, 또 그 마음으로 친선 교류를 하자는 의미로 부산경찰불자회를 만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고경감의 주도로 매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회 및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경찰불자들에게 수계법회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고행섭 경감의 별명은 ‘저승사자’다. 언뜻, 독실한 불심으로 부산지방경찰청 내 불법 홍포에 여념이 없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1979년 순경공채로 경찰에 첫 발을 내딛은 경감은 26년간 부산경찰청 폭력계에서 뛴 ‘조폭 잡는 형사’였다. 지역 조직폭력배의 계보를 훤히 꿰뚫고, 웬만한 폭력조직 두목들도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 조폭 컴퓨터’라는 별명도 함께 따라다닌다. 폭력 조직간 통합 움직임과 보복폭행 등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머릿속 계보도를 활용해, 핵심 조직원들을 검거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뜨거웠던 1992년에는 칠성파 등 부산의 4대 폭력조직을 일망타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요즘에는 조폭들이 교문 앞에서 어린 학생들을 데려가 조직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발을 담그면 돌이킬 수 없는 곳이기에, 조직계보를 차단하는 길은 초중고에서 탈선하는 청소년을 조기에 바로잡는 방법 뿐. 5년만 바짝 신경 쓴다면 조직폭력 집단의 인력수급에 공백이 생겨, 그 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위기청소년들에게 사랑과 정의, 양보와 배려, 준법정신과 사회봉사를 가르쳐줘야 하는데, 이때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불교”라며 “‘그러지 마!’라는 제재보다는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도방법”이었다고 덧붙였다.
조폭들의 저승사자로 26년을 숨 가쁘게 달려온 고행섭 경감을 지탱해준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이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고 경감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고, 이모님은 제주 한 사찰의 스님이었다. 12월 30일 섣달그믐, 요즘처럼 폭설이 내리던, 10남매 중 아홉째인 그가 태어나던 날 눈길을 헤치고 찾아온 스님이 계셨다. 난데없는 목탁 소리에 고 경감의 외할머니가 스님을 집안으로 모시고, 산모에게 줄 미역국을 공양 올리게 됐다. 그 스님은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아준 후 한자로 이름을 적어준 뒤 자취를 감췄다. “그때 적힌 이름이 바로 ‘행섭(行燮)’인데 보통 이름에 쓰는 행복할 행幸자가 아닌 나아갈 행行자라서 다들 의아해하고, 너무 강한 이름이라고들 싫어했어요” 그렇게 불연으로 나고 자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모가 계시는 ‘절 동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늘 배고팠던 시절인연 탓에 떡과 과일을 주는 절이 마냥 좋았다고 한다. 20살이 되던 해, 최전방 대성산 삼천봉에서 군 생활을 보낸 고 경감은 쫄병 시절 새벽 보초를 설 때면 두려움을 잊기 위해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아련히 목탁소리가 들렸다. 군 제대 후 고향으로 내려가 목공소에서 일도 하고, 농사도 짓던 중 친구의 권유로 1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경찰시험에 합격해 제주가 아닌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온 지 30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고향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부산이 제2의 고향됐다. 처음 다닌 부산불교교육대학을 바쁜 탓에 수료하지 못하고, 이후 포교사 시험 합격, 부산불교신도회 불교아카데미 1기를 수료하는 등 본격적인 신행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12월 30일 은퇴로 약 30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했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선현 거사로서의 ‘제 2의 인생’이 시작됐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바로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불법을 통해 청소년 범죄를 예방하고 조직폭력배 집단을 와해시키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야간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재입학해 2년째 보육교사 2급, 사회 복지사 2급 등 공부를 하면서 ‘진작 알았더라면 더 많은 아이들을 감싸 안아 정상궤도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많다.
2005년 그가 고안해 전국에서 처음 시행한 ‘스쿨폴리스(학교지킴이) 제도’와 ‘사랑의 경찰교사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청소년 문화센터’가 그것이다. 그동안의 경찰 생활에서 공부해온 것들을 잘 다듬어 위기청소년을 선도하고, 전과자의 재사회화, 학부모 교육 등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고 경감은 “청소년에게는 충고보다 칭찬받는 법, 슬기롭게 부처님법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조직폭력배는 우리 사회에 없어야할 존재이긴 하지만 머리에 뿔이 난 외계인은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 이웃, 친구일 것이고 함께 살아가야하는 이들이다. 불법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다시 돌아올 것”고 말했다. 또 “흔히 조폭들이 욱하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내 잘못으로 세상을 볼 면목이 없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일 뿐. 부처님의 고행을 뒤따르면서 업장 소멸할 길을 스스로 찾아 마지막으로 절에 가고 싶어 한다”며 법당의 문을 열어놓고 이들이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내 별명이 저승사자인데,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저승사자는 죽을 사람을 데리고 가지만, 재량권이 있어서 할 일이 남은 사람은 좀 있다가 데려간다고 하더라. 나도 그런 저승사자라면 좋겠다” 실제로 그가 선도한 어느 전과자는 18년간 복역한 후 교도소에서 수계를 받고, 불교에 입문해 스님이 돼 지금까지 보살행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부처님 전에 잘못한 일들을 참회하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지역 독거노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사회의 낮은 곳, 어두운 이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고행섭 경감이야말로 우리시대 호법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