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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一切唯心造)’라고 한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나’라고 여기기도 하고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등 여러 가지로 이해되는 마음을 두고 종교와 철학은 수많은 이론을 풀어냈다.
최근의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음은 뇌의 어떤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뇌가 없으면 의식도 없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단백질로 구성된 뇌에 전기적 소통작용의 결과가 마음이라 하기에는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하다.
유식불교에서는 ‘인식이 바뀐 후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轉識得智)’고 말한다. 미혹의 윤회를 벗어나 깨침의 증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고영섭 교수(동국대)는 인문학 계간지 <문학·사학·철학> 제15호에 ‘마음에 대한 고찰’을 발표해 이 같은 궁금증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구해 눈길을 끌었다.
불교에서는 인식의 기반을 심ㆍ의ㆍ식으로 설명한다. 심의식은 각각 제8식 아뢰야식(저장의식)과 제7식 말라식(사량의식), 제6식 요별경식(분별의식)으로 설명된다.
범어로 마음은 떨어져 있는 대상을 사고하는 주체와 작용을 가리키는 찌따(citta)와 사고작용을 갖추지 않은 마음을 뜻하는 흐리다야(hrdaya)의 두가지 어원을 갖는다.
고 교수는 “인도인들은 마음을 심리작용의 주체로서 세계를 왕과 같이 지배 통솔하는 존재라는 뜻의 심왕법(心王法)과 심장 혹은 염통과 같이 작용을 갖추지 않은 마음으로 나눴다”면서 “마음을 두 언어로 표현한 인도문화의 정신적 경향과 이들 모두를 ‘마음’이라 표현한 중국문화의 ‘즉물적 성격’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근본불교에서 마음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을 내용으로 했다.
고영섭 교수는 “초기경전에서는 수행과 해탈에 장애되는 번뇌가 마음에 유입돼 온다고 설했다”며 “번뇌와 업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마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노력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 교수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체계는 마음의 본질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존재의 분석을 통해 윤회의 주체를 파악하려 했던 부파불교에서는 어땠을까?
고영섭 교수는 “부파불교의 마음에 대한 담론도 번뇌설과 함께 이뤄졌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특히 번뇌가 마음을 오염시키는 심리적 요소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며 “번뇌는 수면(隨眠)의 개념으로 마음을 괴롭히거나 오염시키는 여러 심리적 요소 가운데 상위개념으로 이해됐다”고 설명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 마음은 “미혹한 현실세계는 오직 마음의 소산일 뿐, 마음 바깥에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三界唯一心 心外無別法)”는 화엄교설 등으로 접목됐다.
고영섭 교수는 “식(識)사상이 곧 심(心)사상으로 전개됐다”면서 “일심(一心) 사상은 중국 선승들에게 수용돼 실천적으로는 무심(無心)의 사상으로 깊어졌다”고 강조했다.
<반야경> 중심의 삼론종에서는 마음을 중도(中道)에 대응시켰고, 천태종에서는 마음을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의 중체(中諦)에 상응시켰다. 열반종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고, 화엄종은 “삼계는 모두 허망하며 다만 일심이 만들어낸다”는 구절에 집중해 유심과(唯心)와 일심(一心)을 강조했다.
고영섭 교수는 “마음을 일정한 대상과 결부시켜 마음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몰아적인 명지(明知)를 얻는 인도의 명상법을 중국불교 초기 수행자들 역시 수용했다”고 말했다.
달마 이후 중국 선종은 마음의 집착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고 교수는 “무심(無心)은 마음에 대한 망상과 집착을 부정하지만 마음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선종이 내세우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은 물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심시불(卽心是佛) 등에서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고승들 역시 마음을 중요시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 개념을 새롭게 변용시켰다. 고영섭 교수는 “원효는 갈라진 주장들을 하나로 모아 일심으로 회통시켰다”며 “원효의 사상적 바탕인 일심은 부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자 넓은 마음이며, 대비심의 구체적 표현”이라 말했다.
지눌도 <수심결>에서 “마음을 닦는 수행자는 먼저 조사의 도로써 자기 마음[自心]의 본래 묘함[本妙]을 알아 문자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고 해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강조했다.
원효의 일심(一心), 지눌의 진심(眞心), 혜심의 무심(無心)에 이어 태고는 자심(自心)을 내세웠다. 나옹의 ‘쓸 마음이 없다(無心可用)’는 말이나, 휴정의 일물(一物)도 무심의 변용이었다.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허 역시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안다(照了心源)’ 거나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춘다(返照心源)’라고 해 조심(照心)을 강조했다.
고영섭 교수는 “조심은 비추는 마음이기도 하고 마음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라 설명했다.
고 교수는 “용성은 마음을 깨달음(覺)으로 변용했고, 만해는 유심(惟心)을 성철은 돈심(頓心)을 강조했다”며 “한국의 유수한 불교사상가들은 ‘마음’을 자기화해 촘촘한 사상적 지형도를 그러냈다”고 주장했다. (02)2260-3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