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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파동으로 시끄럽던 2008년이 가고 2009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를 맞았다. 12년 전 1997년 정축년(丁丑年), IMF 외환위기 사태로 대한민국이 침통한 세월을 보내더니, 내년 ‘기축년’도 국내 안팎의 경기 악화로 삶이 고단할 전망이다.
‘소의 해’를 힘들게 보냈던 우리 삶과 달리 소는 친근하면서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풍요, 부, 길조, 의로움, 자애, 여유’ 등의 의미들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소 같이 일한다’라는 말처럼 소는 순박과 우직함, 근면의 대명사다. 비록 느리지만 인내력과 성실성이 돋보이는 동물이다.
특히 불교에서 소는 ‘인간 심성의 본래 자리’를 의미한다. 경기가 어렵고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소처럼 우직하게 내 안의 불성(佛性)을 찾는 한해를 보내자.
# 우리 삶속의 소
소는 십이지의 두 번째 자리다. 소띠 해는 12년마다 축년(丑年)으로, 음력 12월은 축월(丑月)로, 일(日)은 축일(丑日)로, 시간은 오전 1시에서 3시까지인 축시(丑時)로 표기된다. 여기서 축년과 축일은 육십갑자 중 을축(乙丑), 정축(丁丑), 기축(己丑), 신축(辛丑), 계축(癸丑) 등의 순서로 표기된다. 방위는 북북동 방향(丑方)을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짐승으로 부와 재산, 힘을 상징했다. 농경의 바탕이라는 인식과 함께 부유와 번창이라는 소에 대한 재산 관념이 이를 증명한다. 고려ㆍ조선시대에는 매년 농신(農神)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물로 소를 바쳤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풍년을 기원하는 소놀음굿이 펼쳐졌다. 뿐만아니라 소뼈나 고삐를 걸어 악귀의 침입을 막는 축귀의 역할도 했다.
이러한 기능 외에도 소의 부속물인 뿔, 가죽, 기름, 고기 등은 실생활의 주요 재료로 폭넓게 이용됐다. 소뿔을 쪼개 가공한 화각공예품, 쇠가죽으로 만든 북ㆍ장구ㆍ소고 등의 악기, 음식 관련 서적에 보이는 소고기 요리 등 다양한 쓰임은 ‘소는 하품 밖에 버릴게 없다’는 말에 함축돼있다.
특히 소는 종교심의 투영에서도 그 상징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한다. ‘십우도(十牛圖)’ ‘심우도(尋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현하고 있다. 유교에서 소는 의로움(義)을 상징하며, 도교에서는 유유자적함(悠悠自適)을 의미한다.
# 불교 속 소 이야기
소는 불교와 친밀한 동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소와 인연이 있다. 부처님의 태자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고타마’의 뜻은 ‘가장 좋은 소’, ‘거룩한 소’란 뜻이다.
선불교에서 소는 불성, 본래면목, 자성을 상징한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만 하고 있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에게 “소가 수레를 끄는데 만약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여기서 소는 마음을, 수레는 육신을 뜻한다.
마조 스님의 제자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도 ‘남전의 소’를 설법했다.
“나는 소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런데 동쪽으로 끌고 가려 해도 남의 논밭을 지나가야 하고, 서쪽으로 끌고 가려고 해도 남의 논밭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디로 가더라도 논밭을 망친 변상을 해주는 도리 밖에 달리 방법이 전혀 없다.”
남전 선사가 제시한 소는 보살의 화신이다. 보살행을 성취해 나아가는 남전 선사 자신이고 모든 사람의 본래면목을 뜻한다. 소를 길들이는 것은 분별ㆍ집착심을 버리는 수행을 의미한다. 소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에 바탕해 선(禪)의 일상성을 드러낸 일화다.
근대 한국불교의 초조라 할 수 있는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의 호(號)는 번뇌, 망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소를 기른다’는 목우자(牧牛者)였다.
조선 선불교의 중흥조인 서산 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임종게(臨終揭)>에서 진흙소를 얘기한다.
천 생각 만 생각이
붉은 화로의 한 점 눈이다.
진흙소가 물 위로 다니나니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진다.
여기서 진흙소는 물론 가상의 소이며 헛것이다. 헛것이므로 물위로 걸어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헛것이 아닌, 가상의 것을 통해 가상 이상의 진실을 꿰뚫는, 일체 유위법을 다 무너뜨리고 무위의 법에 도달하는 본래마음을 상징한다. 서산 대사의 진흙소는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었던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스님으로 법맥이 이어져 현묘한 도(道)의 작용을 표현한 <진흙소의 울음(泥牛吼)>으로 되살아났다.
누구나 인생을 살지만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 그러할수록 내 본래면목(소)을 길들이는 방법이 중요하다. 이미 길들여져 있다는 도리를 터득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불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수행을 통해 자각해야 함을 선사들은 ‘소’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청거호승(淸居皓昇) 선사는 목우도(牧牛圖) 12장을, 태백산의 보명(普明) 선사는 목우도 10장을, 불국유백(佛國惟白) 선사는 목우도 8장을 각각 제시했다.
# 심우도(尋牛圖)의 의미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라는 뜻을 가진 ‘심우도송(尋牛圖頌)’의 본래 명칭은 ‘소를 길들인다’라는 의미의 ‘목우도송(牧牛圖頌)이다. 열 단계로 나누어 그려졌기에 ’십우도송(十牛圖頌)‘이라고도 불린다. 참선 수행자의 수행단계를 잃어버린 소를 찾아 길들여 돌아오는 과정에 비유해 그림(圖)과 시(頌)로 도해한 것으로 선종(禪宗)의 유행과 더불어 다양한 버전이 전한다.
① 심우(尋牛):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본성을 잊고 찾아 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의 입문을 상징한다.
② 견적(見跡):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③ 견우(見牛): 동자승이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에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④ 득우(得牛):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⑤ 목우(牧友): 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때이다.
⑦ 망우재인(忘牛在人):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에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⑩ 입전수수(入廛垂手): 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나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기축년(己丑年) 불교 소사
△ 689년 (통일신라 신문왕 9년): 전길(詮吉) 스님 등 50여 명이 일본으로 감.
△ 809년 (통일신라 헌덕왕 1년): 해안사(海眼寺) 창건, 뒤에 은해사(銀海寺)라 개칭함.
△ 929년 (고려 태조 12년): 인도의 삼장(三藏) 법사가 구산사(龜山寺)에 옴(930년 입적).
△ 989년 (고려 성종 8년): 조종후(祖宗后)의 제기(齊忌)에 도살육선을 금함. 여가(如可)가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가져옴.
△1109년 (고려 예종 4년): 문덕전에 약사도량을, 정영전에 우란분도량을 설치함.
△1229년 (고려 고종 16년): 고려 강종의 왕사인 화장사(華藏寺)의 대선사 지겸(志謙) 스님 입적.
△ 1289년 (고려 충렬왕 15년): 삼국유사(三國遺事)편찬한 일연(一然) 스님 입적.
△ 1649년 (조선 인조 27년): 서산대사((西山大師) 4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소요태능(逍遙 太能) 스님 입적.
△ 1769년 (조선 영조 45년): 해인사 대적광전 건립.
△ 1899년 (조선 고종 36년):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印刻)해 각 사찰에 분배함.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