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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한 해를 보내고 새해 새날이 밝았다. 희망찬 한 해의 시작이다. 국민 모두가 힘들어 하며 장탄식을 하던 지난해였다. 결과에는 필연의 과정들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모두가 감내할 공업(共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학교에 가면 급훈이 걸려있다. 대부분 정직, 성실, 노력을 적고 있다. 그 가르침 속에서 배우고 익혀 세상살이를 하는 우리들은 진정으로 그러한가. 나는 정직한지, 성실한지, 노력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해 볼 문제다.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의 탈을 쓰고 살며, 서로 불신의 장벽만 높여 왔다. 차용증서를 주고받지만 상대를 불신해 약속을 어기기 일쑤 아니였는가?
인류의 성장을 이끈 지혜의 결정체는 도덕율이다. 성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걷기 전 기거나 걸음마 시기가 있었듯이 날기 위해서는 열심히 걷고 뛰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기고 걷는 과정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날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보니 우리는 붕괴를 경험하게 됐다. 붕괴는 누가 가져다 준 재앙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괴물이다. 노력 또한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땀 흘리려 하지 않는다.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을 씻으며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노력보다는 불로소득에 익숙해져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자주 접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오염이다. 오염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환경은 물론 인류의 생존 자체마저도 위협하고 있다. 인간을 행복의 요람에서 살게 하는 지혜도 잘못 쓰면 오염이라는 재앙을 불러와 우리 자신을 상처내고 마침내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이 있다고 해도 생각이 바르지 않고 그것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지구에는 재앙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오염과 환경파괴는 외계인이 안겨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고 저지른 행위의 소산이다. 이는 이기심이 발동돼 야기된 문제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마음 닦기를 중요히 여겼다.
마치 마음은 원숭이와 같다. 한 가지에 차분히 있지 못하고 이 가지 저 가지로 한 시도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간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이기심이 발동하는 순간 변별력은 그 척도를 잃고 만다. 욕심은 시력을 떨어뜨리고 청력을 잃게 한다. 탐욕은 방향감각을 잃게 만든다. 탐욕은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괴물이다.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어낸다(一切唯心造)”는 부처님 가르침은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생각을 도구로 인생이란 캔버스에 그리는 자신 만의 그림대로 살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생활하면서 꽃을 생각하고 행복과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게 수놓이지만 불안, 초조, 악몽에 시달린다면 그만그만한 일로 주저앉게 된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이다.
올 해는 지난 해 겪던 마음의 짐을 벗어 버리자. 고통스럽다는 것도 영혼을 닦기 위한 수행과정이라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홀가분해 진다. 지금 겪는 고통의 순간이 우리 삶을 성숙시키는 과정이라고 보면 숨이 고르게 되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된다.
정진바라밀은 수행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터득하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정진 없는 수행자에게는 공허만이 메아리칠 것이고 정진 없는 삶은 허탈만이 엄습하게 된다. 정진은 승속을 아우르는 묘약이다. 좌절을 이기는 묘약이며 안정된 내일을 기약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정진 없이 이룩된 일이 그 무엇이 있던가. 건반 위를 휘감는 피아니스트의 손놀림, 뮤지컬 배우의 무대에서의 발놀림, 성악가의 신 내린 음성도 정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스키프(skip)를 허용하지 않는다. 점핑은 부실을 초래한다. 사고의 점핑은 오해와 불신을 낳기도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만나면 피해가지 않는다. 지루하고 힘들어도 웅덩이에 물을 채운 후 앞을 향해 달린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서 삶의 예지를 터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