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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뛰어 넘어야 부처님 은혜 갚는다"
신규탁 교수 불천강경법회서 <벽암록> 강의

연세대 철학과 신규탁 교수.


강사 : 신규탁 교수(연세대 철학과)
주제 : <벽암록> 제11칙 황벽주조한(黃蘗酒糟漢)
일시 : 2008년 12월 9일 저녁 7시
장소 : 서울 기원정사 법당
주최 : 불천강경협회


서울 홍제동에 위치한 기원정사(회주 성파, 02-736-0367)에서 재가불자 수행의 모델이 될 ‘불천강경법회(不千講經法會)’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약 70분간 진행된다. <화엄경>과 <벽암록>을 교재로 매주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도심 속 마음 수련회다. 법당에 자리한 불자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법계에 귀의하는 향수해례(香水海禮)를 시작으로 강연이 이어졌다.

강사로 나선 신규탁 교수는 “불교는 이웃 종교에 비해 현대적인 포교가 늦게 마련 됐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재가법회는 아예 없었고 개인 불공 위주였지요.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재가불자 법회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법회에서는 반드시 부처님 말씀과 조사스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들의 손에 실제 생활 속에서 불조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안내 지도를 쥐어드려야 합니다”라며 ‘불천강경법회’의 취지를 전했다.

<화엄경> <벽암록>을 교재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묻자, “한국불교 전법의 계보는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하는 선(禪)의 전통에 있으면서, 이와 함께 화엄의 교학으로 선을 돕는 법성종(法性宗)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법회에서도 교재를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실천하기가 어렵지, 내용은 쉽습니다. 이시대의 불자들은 마음을 깨치고 이와 함께 보현행을 해야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법회 주제는 <벽암록> 가운데 제11칙 황벽 스님이 이야기 하신 ‘황벽의 술 지게미 먹는 놈(黃蘗酒糟漢)’ 이다.

서울 기원정사 불천강경법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열린다.


#禪만 있고 선사가 없구나

중국 북송 시대에 편찬된 <벽암록>이 전하는 진실은 ‘실제로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나라 때 활동하던 여러 선사께서 제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소재로 설두중현 스님이 <설두송고>를 만드셨고, 이 <설두송고>를 원오극근 스님이 선방 수자들에게 강의했습니다. 이 강의가 나중에 모여 <벽암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원오 스님의 제자인 대혜종고 스님은 “선어록을 말로 해석해서는 선의 밝은 도리를 깨우칠 수 없다”며 이 책을 불살랐다고 합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고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경책이겠지요. 그 뜻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황벽 스님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황벽 스님이 여러 대중들에게 “너희들은 모두 술 찌꺼기나 먹고 진짜 술을 먹는 듯 구는 놈들이다. 이처럼 수행을 한다면 언제 깨닫겠는가? 당 나라 온 천지에 선사가 없는 줄 너희들은 아는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여러 총림에서 대중을 지도하고 거느리는 자는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황벽 스님은 “선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사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답합니다.

황벽 스님이 대중 앞에서 법문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다가 언제 깨닫겠는가 꾸짖고 계시죠. 그러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고, 이에 스님은 제대로 된 선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황이 전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 집안의 내력을 보면, 임제 선사의 스승이 바로 황벽 선사이고, 황벽 선사의 스승이 백장 선사 이고, 그 위의 스승이 마조 선사이고 남악회양이고 육조혜능입니다.

#스승의 대기대용(大機大用)

젊은 시절의 황벽 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황벽 스님이 젊은 날 백장 스님 처소를 방문했는데, 백장 스님은 한 눈에 젊은 수자가 참 쓸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황벽 스님이 그곳을 떠나 강서 땅에 백장 스님의 스승인 마조 스님을 뵙겠다며 하직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은 “마조 스님은 돌아가셨네”라고 답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 원오 스님은 “황벽 스님이 백장 스님에게 마조 스님을 뵙겠다고 한 말이 과연 열반하신 것을 알고 만나 뵙고자 한 것일까? 모르고서 만나 뵙고자 한 것일까?”하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벽 스님은 “복이 없고 인연이 적어 꼭 만나 뵙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했으나 뵙지 못했다”며 백장 스님이 마조 스님께 하셨던 말씀을 전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두 번 마조 스님을 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백장)가 마조 스님을 뵙자 스님이 불자(拂子, 선종의 장엄구이자 전법의 증표)를 곧추세우셨지. 그리고 물으셨네.”
“이것이 불자로서의 작용인가? 불자를 떠난 작용인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술지게미가 아닌 진짜 술이겠지요. 이 ‘참맛’은 불자와 관계가 있을까요? 아니면 불자와 무관하게 보여주려 한 행위일까요? 마조 스님은 선상 모서리에 불자를 걸어 놓으시고는 한참동안 말씀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백장아. 너는 앞으로 두 입술을 나불거리며 어찌 중생을 구제하려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불자를 뺏으려 했고 마조 스님이 다시 불자를 곧추세우며 제자 백장 스님에게 “이것이 불자로서의 작용입니까? 불자를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백장 스님은 그 불자를 선상 모서리에 다시 걸어 놓지요. 그러자 마조 스님은 위엄스럽게 한 차례 소리를 꿱 질렀고 그 소리에 백장 스님은 3일 동안 귀가 멀었다고 합니다. 백장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그대도 이 훗날 마조 스님의 법을 계승하지 않겠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황벽 스님은 “싫습니다. 이제야 스님의 대기대용(마음의 틀)을 알았습니다. 스승을 그대로 따라했다가는 불법 문중에서 참선하고자 한 자들의 대가 끊길 것입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은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스승을 뛰어넘어야만 그것이 스승님에게 은혜 갚는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큰 스승 부처님께 은혜 갚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보다 더한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은혜 갚습니다.
황벽 스님이 하루는 백장 스님에게 “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리의 등불을 어떻게 보여주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은 아무 답이 없습니다. 황벽 스님은 “앞으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자답하여 서원을 세웁니다. 이 말없는 대답이 하늘을 뚫고 지축을 흔듭니다. 위대한 가르침은 언어가 끝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인간의 말에는 지시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말에 얽매이지 말고 그 말이 지시하는 내용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 자체에 얽매이죠. 그 말의 속뜻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재가불자 법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는 불천강경법회 현장.


#직접 체험하라

황벽 스님과 제자 임제 스님과의 만남에도 사연이 깊습니다.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 회하에 있을 때 목주 스님이 수자로 있었습니다. 목주 스님이 어린 임제 스님에게 “그대는 왜 큰 스님(황벽)께 법을 구하지 않는가?”라고 연유를 묻자, 임제 스님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하였습니다. 목주 스님이 시키는 대로 “어떤 것이 불법의 뚜렷한 대의입니까?”를 묻다가 황벽 스님에게 몽둥이만 세 차례 맞고 돌아옵니다.

임제 스님은 인연이 없다 여기고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하고자 황벽 스님을 뵙게 되는데, 목주 스님은 미리 황벽 스님에게 살짝 귀띔해 임제가 뛰어난 제자임을 전합니다. 그러자 황벽 스님은 “나도 알고 있다”고 답하지요. 황벽 스님은 임제 스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 바로 고안 여울가에 주석하시는 대우(大愚) 스님을 뵙도록 하라”고 일러줍니다.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을 뵙고 몽둥이질만 당한 하소연을 하자 “황벽 스님이 노파심이 간절해 그대에게 사무치게 수고한 것을 어디서 잘잘못을 따지는가”라며 호통 칩니다. 그 순간 임제 스님은 홀연히 크게 깨우칩니다. 그리고 “황벽불법무다자(黃壁佛法無多子)”라고 말하지요. 전거를 찾아보면 ‘황벽의 불법이란 분명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절하지 않고 단도직입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명함이란 무엇인가?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하는 바를 선 수행자들이 여러 가지로 평창하기도 하고 선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하며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사자의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직접적인 체험, 이 소식을 보여주기 위해 술 지게미만 먹고 술을 먹은 줄 착각하는 중생들에게 회초리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겁니다. 진짜 술을 먹고 술맛을 봤다 말해야겠지요. 남이 설명해 놓은 맛을 보고 불법을 맛보았다고 여기는 세간인들을 일깨우는 바가 큽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었을 때,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말로 설명해 줄 수도 있지만 인생은 네가 직접 살아봐야지 누가 대신 전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사의 스승들께서 불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제자가 물었을 때 호통 친 것은 네가 직접 살며 깨우쳐야 할 네 몫이라는 점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삶은 우리 당사자의 실존적인 몫입니다. 당사자 본인의 직접 체험을 권하는 것이, <벽암록> 제11측 ‘황벽의 술지게미 먹는 놈(黃蘗酒糟漢)’에서 전하는 핵심입니다.
가연숙 기자 | omflower@buddhapia.com
2008-12-12 오후 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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