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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가 국내 최초로 환자의 죽을 권리, 즉 이른바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당사자는 지난 2월 폐 조직 검사를 받던 중 폐혈관이 터지면서 곧바로 뇌사상태에 빠져 지금까지 인공호흡기로 연명해 오고 있던, 올 해 76 세 할머니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평소 이 할머니의 언행이나 구체적 행동 사례들로 미루어볼 때, 만약 의사표현이 가능했다면, 인위적인 의료장치를 부착하면서까지 생명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법원에 ‘연명치료 중단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번에 법원이 몇 가지 단서조항을 달긴 했지만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 것이다.
이 사건은 병원의 항소 여부에 따라 앞으로 대법원까지 갈지도 모르는 재판절차가 남아 있지만 존엄사를 둘러싼 찬반논쟁과 그에 따른 사회적 합의 여부를 더욱 재촉할 것으로 보인다.
존엄사란 말은 소극적 안락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안락사는 크게 환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 그리고 반-자발적 안락사로 구분되며, 의료진의 시술방식에 따라 독극물의 주입과 같은 적극적인 안락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과 같은 소극적인 안락사가 있다.
위의 경우는 이 가운데 소생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할 뿐만 아니라 환자가 고령이고 기대수명이 3~4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법원이 제한적으로 허용한 소극적 안락사의 일종인 셈이다.
이는 의료진의 판단보다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더욱 포괄적으로 해석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것의 함축적 의미 때문에 종교계 및 관련 학계의 반발에 부딪혀 사실상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다시 일반국민들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현대 윤리학은 이와 같은 윤리적 갈등의 해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문제의 속성상 정답을 내놓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지역이나 민족,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종교 및 문화 등에 따라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가치관이 그야말로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존엄사 허용의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제에 관한한 사회적 합의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경제적 이유로 환자의 생명권에 대한 가족 등 제삼자의 자의적 판단과 개입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면 이는 여간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환자 본인의 존엄하게 죽을 인격권이 다른 이유로 인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에서도 죽음 그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직접적으로 의도돼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출가자의 경우 자의적이고 소극적인 자살, 즉 요즘 말로 존엄사를 허용하는 듯한 언급도 없지 않아 현대적 의미의 적극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개인적으로는 존엄사가 허용되거나 적어도 암암리에 묵인되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 생각한다.
관건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말하자면 존엄사의 선택은 그야말로 마지막 수단으로 숙고해야 할 방안이자 이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진정으로 환자의 입장에서 불교적 지혜가 요구된다.
여기서 우리는 존엄사의 필요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편으로 불교 호스피스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는 환자들에게 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생사를 초월한 불제자답게 살다 갈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면 존엄사의 공개적 허용이 안고 있는 본질적 위험성을 근본적으로 비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