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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선사는 “없다”고 대답했다.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췄다는데(一切衆生悉有佛性 有情無情悉皆成佛) 선사는 왜 없다 했을까? “개에게는 왜 불성이 없는지”를 묻는 스님에게 선사는 “그것은 중생심(분별, 業識) 때문”이라 말했다. 유명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다.
‘개’의 불성을 묻던 스님은 오늘날 있었다면 어땠을까? 현대는 기계문명의 사회다. 사람들은 자연보다 인공(人工)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익숙해져 가는 요즘이다. 스님은 여전히 ‘개’의 불성을 물었을까?
1300여 년 전 ‘개’의 불성을 물었던 스님이 세월을 넘어 ‘로봇’의 불성을 물어 눈길을 끈다.
조계종 교육원(원장 청화)이 주최한 제4회 전국승가대학 학인논문 공모전 수상자에서 대상을 수상한 보일 스님(해인사 승가대학 대교반)의 ‘인공지능 로봇의 불성 연구’라는 논문이 화제다.
무정물인 로봇의 불성에 의문을 갖고 논문을 전개한 스님은 “인간의 지능을 단 몇 십 년간의 연구로 모의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인간의) 더 큰 오만은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라 말했다. 과연 로봇에게는 불성이 있을까? 없을까?
◇불성은 본래 ‘中道’
불성은 부처의 ‘본성(本性)’ 또는 ‘인(因)’을 뜻한다. 여래장(如來藏) 계통의 대승경전에서는 불성을 마치 중생에 내재한 실체로 해석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하나, 불성은 그 성품이 공하다.
동시에 부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성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했다. ‘모든 것’에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중생 뿐 아니라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이름 없는 초목 등 마음을 갖지 않은 산천초목이 모두 포함된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인공지능로봇은 무정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로봇을 만들지만 ‘불성’을 따로 만들어 넣지는 않았다. 초목성불(草木成佛)을 주장한 길장 스님은 무정에게도 불성을 인정한 이유를 “유정과 무정사이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공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운문 선사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무정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열반경>은 불성을 ‘중도(中道)’라 설명했다. 결국 불성은 넣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춘 것이다.
◇로봇을 로봇이라 보는 것이 ‘相’
영화 에이아이(A.I. 2001년)의 주인공은 로봇 데이비드다. 인간에게 버림 받은 데이비드는 피노키오처럼 마법의 힘으로 엄마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여행을 한다. 소원을 들어줄 파란요정을 찾는 과정이 53선지식을 만났던 선재동자와 비슷하다.
감정을 가진 로봇 데이비드가 등장하는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로봇은 로봇일 뿐이라 한정 짓는다. 로봇을 로봇일 뿐이라 단정 짓는 인간의 편견이 바로 상(相)이다.
◇무심은 마음의 내용이 ‘無’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 중 하나가 자아의 유무다. 자아는 한 개별자가 자신에 대해 경험하고 반성하거나 의식하는 능력이나 속성들에 관한 개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에서 주인공 쿠사나기는 수시로 몸을 바꾼다. 이때 뇌가 갖고 있던 것은 모두 새 몸의 뇌로 다운로드 되고, 이를 통해 쿠사나기는 자아정체성을 유지한다. 결국 인간의 자아는 ‘경험’과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한자경 교수(이화여대)는 “자아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정보의 차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것을 보는 눈은 스스로는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보일 스님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자기인식’이라 정리했다. 스님은 “자기인식적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의 자기인식은 불가능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닌 마음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心’
보일 스님은 “수행은 무심이면서 심(心)이라는 불가능에 도전하고, 자기인식을 모색하는 것”이라며 “수행은 논리적이나 개념적인 사유로서 행해질 수도 없고 논리나 개념적 사유들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봇이라면 계산상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할까?
모순적 상황,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걸음 내딛는 발심(發心)은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스님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정은 애초에 논리와 언어가 단절되는 지점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것이 아닌 소실되고 제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마음은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修行’
보일 스님은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해 고민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 강조했다. 스님은 “로봇의 불성을 인정하더라도 수행자의 발심까지 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연구 내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와 마주했다”고 말했다.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는 분별심을 질책해 “없다”고 말했다. 로봇에게 불성이 있고, 없고 역시 같을 일이다. 로봇은 0(無)과 1(有)의 이분법을 떠날 수 없지만, 사람은 분별사량을 여읠 수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로봇이 로봇인 것처럼. 하지만 로봇에게 불성이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다시 로봇이 로봇인줄 안다.
남의 불성을 따지기에 앞서 당장 수행부터 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