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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성욱 총장이 동국대에 이룬 업적은 크다. 석조건물로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명진관을 비롯해 대학본부와 舊 중앙도서관(現 만해관) 등을 세우며 외형적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연극학과 설립 등 시대를 앞서간 혜안으로 오늘날 동국대의 초석을 마련했다.
유럽 유학시절 “귀국해 불교계를 위해 일해 달라”는 종단의 부름에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했던 故 김법린 박사 역시 외국어 교육원 신설과, 대학박물관·불교문화연구원을 신설하고 인도철학과를 개설하는 등 동국대 중흥과 불교계 발전에 일획을 그은 인물이다.
한국불교학회(회장 김선근)은 11월 22일 동국대에서 ‘근대불교 선각에 대한 회고’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개교 100주년을 넘긴 종립학교로, 민족사학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국대지만 신정아 사건과 로스쿨 탈락 등으로 동국대 위상은 추락했다. 오영교 총장이 학사 운영에의 CS개념 도입 등 동국대에 불고 온 새바람도 대학최초 고객만족경영대상 수상의 이면에는 그칠 줄 모르는 학내 구성원들의 총장 불신임 외침이 있다.
백성욱·김법린 박사의 회고가 오늘날 동국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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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발전 초석 이룬 백성욱 박사
정종 명예교수(동국대)는 ‘백성욱의 불교사상과 활동’을 발표했다.
93세 망백(望百)의 나이에도 원고 없이 서서 1시간 넘게 쉼 없이 이어진 정 명예교수의 발표는 “좋은 스승을 만남은 행복의 조건이요,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로 시작됐다.
백성욱 박사(1897~1981)에게 붙는 칭호는 불교학자, 독립운동가, 승려 등 다양하다. 백 박사는 단 시일 안에 흡사 옛 고승대덕들이 대가람을 창건하듯 목멱산(現 남산) 기슭에 대담하게 또 당당하게 석조건물 명진관과 대학본부 등을 세웠다. 동국대 부지 7~8만여 평이 백성욱 박사에 의해 조성됐다. 백성욱 박사는 한국불교 중흥과 근대화·대중화를 위해 대동국 건설에 집념을 보인 선각자였다.
백 박사가 총장취임 후 일차적으로 착수했던 것은 판잣집에 지나지 않았던 개인 교수실 마련사업이었다. 대학이란 궁긍적으로 교수양성기관으로 강의실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선진국의 실례에 따른 지론이었다. 건물과 시설 위주가 아닌 도서관 중심, 교수와 연구실 중심의 백성욱의 지론은 당대 최고 영문학자 최재서 교수를 초빙해 대학원장에 임명하는 파격적 인사로 이어졌다.
당시 친일파로 지탄받던 최 교수를 학내 구성원 반발을 무릅쓰며 등용한 이유에 대해 백성욱 총장은 “동국대 교수들에게 평생을 두고 시종일관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의 산 모델을 실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백 박사는 무(無)에서 동국대를 일궜으며, 이 배경에는 이승만 노선 지지적 기반이 있어 가능했다.
동국대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목멱산을 깎아 먹는다는 비난이 빗발치던 때다. 코리아하우스(現 한국의 집)을 찾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백성욱 박사가 하는 대학이 어디냐? 들려서 가자”해 동국대를 들렀다. 부재중이었던 백 박사는 다음날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을 깎아먹는다기에 계획 없던 걸음을 했다”고 말하자, 백성욱 박사는 “이제 그만 깎아먹겠다”고 답했다. 국유지로 경무대와 직선거리였던 목멱산 중턱에 대학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을 알려준 일화다.
백 박사는 한민족은 바다를 갈아먹고 살아야한다며 남해에 해양연구소를 만들 구상을 했고, 연극학과를 두어 대중들에게 사람다운 매너를 연극으로 가르쳐야한다고 강조했을 만큼 시대에 앞선 비전을 갖고 있었다.
백성욱 박사의 모든 행동은 영원무궁한 불자들의 보금자리와 도량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5·16혁명으로 인해 총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백 박사의 동국대 개혁은 멈춘 적이 없었다.
회고를 마친 정종 명예교수는 “불교 없는 동국대도, 동국대 없는 한국불교계도 생각할 수 없기에 백성욱의 위치는 한국불교의 중흥조로서 원효적·보조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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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효시 김법린 박사
동국대는 운수가 좋지 않았다. 김법린 박사가 백 총장의 뒤를 이어 총장에 올랐으나 단명으로 끝나 학교가 답보상태에 이르렀다. 김 박사는 “내가 이 자리에 있고 보니 백 박사가 불과 7~8년 동안 이 많은 것을 해냈다는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족탈불급(足脫不及,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밖에서 보기와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았노라”라고 말했다.
김법린(1899~1964) 박사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 독립운동가였다. 총무원장으로 해방 직후 불교교단을 견인했고, 문교부장관 및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김법린 박사에 대해서는 김상현 교수(동국대)가 ‘김법린과 한국근대불교학’을, 이봉춘 교수(동국대)가 ‘김법린의 불교사상과 활동’을, 조준희 소장(국학인물연구소)이 ‘김법린의 유럽에서의 민족운동’을 발표했다.
김법린 박사는 전통불교에 기반을 둔 승려였으나, 해외유학을 통해 신학문을 공부한 대표적 지성인이었다. 김 박사는 근대불교학의 문헌학적 연구방법론과 함께 범어 불전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이다.
김법린 박사는 1931년 1월 발행된 <불교> 제79호에서 “학계의 신 동향과 정확한 전거를 참고할 수 없는 교수의 강의는 전통에 빠지거나 독단화하기 쉽다. 학부로서 학문적 사명을 다하게 함에는 도서 완비가 기초적 조건이다”라고 적었다. 중앙도서관 하나 없던 불교계를 지적한 그는 “교학적으로 빈약하니 교운이 부진한 것은 당연하다”며 절망했다.
신불교학의 건설이 조선불교의 최우선 과제라 생각했던 김법린 박사는 이후에도 일본 등에 유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1945년 8월 19일 조계종 종권을 인수한 김 박사는 조선불교로 지칭하도록 하고, 총본산 태고사와 31본사를 해산시키는 등 개혁 후 총무원장에 올랐다.
김법린 박사는 비구승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대의 역행이라 경계하며, 민중본위적 불교운동을 주장한 선각자였다.
다솔사 강원 등에서 서양철학 등을 강의하며 인재불사에 몰두했던 김 박사는 동국대 총장 취임 후 여러 업적을 이루며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년들의 외국어 능력을 강조해 외국어교육원을 세웠고, 불교의 생활화와 자기완성의 수도장으로서 대학선원을 열었다. 대학선원은 역경원 설립의 모태가 됐다. 불교문화연구원, 박물관 설립에도 앞장선 김법린 박사는 불교학 연구를 위한 기반적 학과로서 인도철학과를 개설했다.
이봉춘 교수는 “김법린 박사는 만해 한용운의 제자로 근대와 혁신의 새 불교사상을 주창한 인물”이라며 “민중본위적 불교사상과 현실참여적 불교사상의 형태로 구체화됐다”고 정리했다.
한편 이에 앞서 오전에는 △보광 스님(동국대) ‘허응당 보우의 <권념요록> 연구’ △여현 스님(동국대) ‘초기선종사에 있어서의 <능가경> 일고찰’ △김성장 교수(원광대) ‘일분호흡을 기본으로 하는 단전주 선의 원리방법 체험 등 10여 편의 논문이 자유주제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