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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널찍한 지붕 위로 겨울비가 내린다. 아랫마당의 석탑도 비에 젖고 산새들도 숲에 앉아 비를 맞는다. 만월당 처마 밑에는 가을에 걸어놓은 감이 숨은 햇살을 기다리고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중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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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오르는 길에는 까치집이 한 채 들어섰고, 오솔길의 나뭇가지에는 이제 잎새도 없이 차가운 빗방울만 매달려있다. 계절은 늘 남김없이 사라지고 또 어김없이 돌아온다. 까치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부처님 모신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만 종일 빗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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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을 펼치기 위해 이국에서 먼 길을 왔던 연기 스님, 도반의 위대함에 또 한 번 깨달았던 의상 스님, 감동적인 불사(佛事)를 이룬 계파 스님, 화엄을 위해 살다간 선지식들의 흔적 화엄사. 그 옛날처럼 비가 내리고 그 옛날처럼 젖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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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가 들린다. 사시예불이다. 운무(雲霧)에 싸인 지리산 봉우리들이 법당을 향해 앉고, 겨울비에 숨었던 산새들이 각황전 지붕 위로 날아든다. 글ㆍ사진=박재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