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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원로 A씨의 이야기다. 50여 년 전 A씨가 대학에 진학 할 때의 일이었다.
A씨는 서울의 명문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두 군데에 합격했다. 누구라도 등록금이 훨씬 싼 국립대학에 입학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A씨는 국립대학을 포기하고 사립대학에 등록했다.
이유는 자기가 국립대학을 포기하면 같이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친구 B씨가 대신 그 대학에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자신이 양보하여 가난한 친구가 등록할 수 있게 희생한 것이었다. 다른 이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명문대 입학을 양보한 A씨는 공직 생활을 거치고 문단 생활까지 착실히 하여 존경받는 인사로 은퇴했다. 은혜를 입은 B씨 역시 주요 공직에 일생을 바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고 행복하게 가족 속으로 은퇴했다.
이 이야기는 B씨로부터 들은 실화다. A씨는 평생동안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감동적인 이타였다.
불교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타행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이타 행위를 집단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개미나 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먹이를 모으고 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왕벌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자기의 유전자를 보전한다.
유전학자들은 이타주의는 집단으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 이타주의를 선택한 집단은 이기주의로 구성된 집단보다 성공적으로 살아남는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진화론에서 설명하는 자연의 선택에서 최고의 수준에 이른 집단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남을 위해 하는 보시 행위는 행위자 스스로는 물론 인간 사회 전체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최고의 선택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선택을 인간에게 가르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손수 이타행을 하셨다. <중아함경>을 보면 제자들이 아나율타 존자를 위하여 옷을 만들고 있을 때 “아난아, 너는 왜 내게는 아나율타를 위하여 옷을 만들자고 청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며, 비구들이 옷 짓는데 찾아가 함께 옷감을 펴 마름질하고 잇대어 붙이고 기웠다.
또한 소를 잃어버려 찾아 헤매던 농부가 밥 때를 놓치고 설법자리에 오자, 집주인에게 농부를 위하여 남은 밥을 주라고 하신 다음 농부가 밥을 다 먹은 뒤에야 비로소 설법을 베풀었다.
대중이 의아해 하자 부처님께서 “농부가 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줄 알고 그 먼 지방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법을 듣다가 배고픔을 느낀다면 배고픔 때문에 여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여래는 먼저 그의 배고픈 고통부터 해결시켜준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고픔처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법구경>에 나온다.
부처님께서는 보시(布施)를 이타행의 으뜸이라 하셨다. 보시에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요즘같이 경제적 위기에 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한 해의 끝 계절, 가난한 이웃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재시다. 심리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은 생존의 욕구를 우선 충족해야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존경도 하게 되고 자아실현도 하게 되는 것이다.
살기 어려워지니 내 형편부터 살피고 재시를 베풀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내 사정이 좀 나아지고 난 뒤에나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런 마음을 경계해 부처님께서는 <백유경>을 통해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로써 말씀해 주셨다.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매일 젖을 짜는 게 귀찮아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짜려 했다. 그러나 젖이 말라 버려 결국 젖을 짜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재시 역시 재물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많이 쌓이면 하는 것이 아니라 소젖 짜는 일과 같이 어려운 형편일지라도 늘 마음을 내어 나누는 게 중요하다.
법문보다 한 끼 밥을 먼저 챙겨 주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 경제 위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때다. 재시란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과 인류 전체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추운 올 겨울, 불자들의 따뜻한 손으로 우리 이웃의 언 몸을 훈훈하게 덥혀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