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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의 황금어장’이라 불리지만 열악한 포교환경으로 아무나 나서기 힘든 곳. 한국 불교의 중흥과 호국불교의 명맥을 잇기 위해 스님들이 군포교에 나선지 40주년을 맞았다.
조계종 군종특별교구(교구장 일면)는 11월 25일, 군종교구 호국원광사(주지 함현준 법사)에서 군승 통일가사 봉정식을 시작으로 군승 파견 40주년 기념 ‘군승의 날’ 행사를 성대히 봉행한다.
이날 행사에는 군포교사를 정리한 <군불교 40년사> 봉정과 순직 군승 합동 천도재, 전 군법사가 참여한 군승회의 등이 열린다. 군승회의에서는 올해 군승사업 결산 및 내년도 사업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군승의 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기념법회는 오후 6시 W컨벤션센터(구 하림각)에서 봉행된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해 보선 스님(중앙종회의장), 김의정 회장(중앙신도회), 정인악 회장(군불교후원회) 등 사부대중 500여명이 참석할 행사는 총무원장 스님 법어와 40년간 거쳐 온 군승들의 활동상을 담은 영상물 상영, 통일가사와 <군불교 40년사> 봉정식, 공로자 표창수여식 후 만찬을 연다.
# 군승의 어제와 오늘
군법사가 태동한 것은 1960년대다. 1948년 정부수립 당시부터 불교는 개신교, 카톨릭과 함께 국군조직법에 따라 정식으로 종교 활동을 펼쳤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공백기를 맞았다.
1950~60년대 청담 스님, 능가 스님 등 당시 조계종 중진스님들은 군포교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군포교 활동에 힘쓰고 있었다. 1964년 3월 14일 조계종 총무원이 국방부에 ‘군종법사 제도 설치 청원서’를 제출하면서부터 군법사의 태동은 시작됐다.
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1965년 2월 11일 조계종은 국방부와 국회, 청와대까지 ‘군법사제도 설치 청원서’를 재차 제출했다.
3월 17일 국회 국방분과위원회가 1년간 군법사 제도 연구기간을 정하는 등 4개항을 결의하면서 8월 30일 각 군 본부 등의 불교활동 지원을 위해 군포교사 10명이 위촉됐다.
동국대에 군승후보 교육원이 개설되면서 군법사 양성이 가시화되자, 개신교는 거센 반대에 나섰다. 1967년 군법사 탄생을 위해 사부대중이 모두 나섰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시위를 벌이는 등 종단과 신도들의 끈질긴 요구로 군법사 파견을 위한 행정조치가 하나 둘 시작됐다.1968년 5월 독실한 불자였던 최영희 장군이 장관에 임명돼 군승 파견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후 1968년 11월 30일 훈련을 마친 제1기 군승후보생 5인(김봉식ㆍ권기종ㆍ권오현ㆍ장만수ㆍ이지행)이 군승 1기로 임관하면서 본격적인 군승의 역사가 시작됐다.
군승 파견 40주년을 맞은 지금, 최초 5명이던 군승의 수가 14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곳도 없던 군법당도 200여 도량을 갖췄다.
2007년 12월 현재 군불자는 11만4085명이다. 개신교 신자 21만5280명의 절반수준이다. 군포교 주역인 군종 법사는 139명(육군 97명, 해군 19명, 공군 23명/사미계 수지자 80명, 구족계 수지자 59명)으로 군승 파견 최초 5명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한 곳도 없던 군법당도 200여 도량으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다. 민간성직자 600여 명과 불광사, 조계사, 봉은사 등 대형사찰 신도회와 조계종 포교사단 등이 군포교를 돕고 있다.
# 군승의 내일
미래불교를 위해 군포교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조계종은 2005년 7월 25일 군종특별교구를 출범시켰다. 군종특별교구는 2008년 5월 20일 종단 최초로 결계 및 포살법회를 봉행한 것은 물론 체계적인 군불교 지원과 군불자 자긍심 고취, 군종법사 위상 및 복지 향상에 앞장서왔다.
교구장 일면 스님은 “군종교구는 출범 이래 ‘한국불교의 미래 군불교’를 표어로 △제도정비 통한 교구 체계구축 △종단 정체성 확립 △군포교 역량강화 모색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며 “앞으로도 체계적, 시스템화된 군포교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말했다.
이를 위해 군종교구는 국방부의 2013년 육군 훈련소 통합 계획에 맞춰 육군훈련소 내에 5000명을 수용할 법당 불사를 비롯해 군 구조개편에 따른 전략적 포교정책 개발 등에 나서고 있다.